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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코리아/인요한]공권력이 필요한 까닭

입력 | 2011-09-02 03:00:00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고조할아버지와 진외조부를 비롯해 우리 집안은 전통적으로 사냥을 즐겼다. 나 역시 매년 사냥터를 찾아 개와 함께 사냥을 즐긴다. 단순히 동물을 잡는 게 좋아서가 아니다. 수렵을 통해 한국 곳곳을 직접 걷고 뛰며 알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5년 전 일이다. 고향인 전남 순천으로 사냥을 떠났다. 총을 출고하기 위해 오전 6시 무렵 인근 지구대로 갔다. 문을 열자 고함 소리부터 들렸다.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경찰관 두 명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혼란한 가운데 총을 찾았지만 이런 상황을 모르는 체하기 힘들 정도로 사태가 지나치게 악화되고 있었다.

나는 사냥복을 입고 강인해 보이는 인상의 모자를 쓰고 가죽장화를 신은 채였다. 그 차림새로 긴 사냥총을 어깨에 메면서 나는 그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남자는 이제 경찰관들 대신 나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사복을 입고 있는 이 사람들을 밖에서 만나서 욕을 하고 싸우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제복을 입고 있다. 곧 당신은 지금 국가를 욕하고 있다. 나는 그런 행위를 참을 수 없다. 나하고 한바탕하고 싶으냐?” 남자는 총을 든 내 모습에 겁이 났는지 경찰관들과 나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채 뒷걸음질쳐 도망갔다. 버릇없는 술버릇은 말로는 소용이 없고 때려서 고쳐야 한다는 옛말이 있다지만 미국 같으면 곧바로 수갑을 채워 유치장에 넣었을 것이다.

나는 1980년대 의대생 시절 수많은 시위 현장을 봤고,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와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 공권력이 지나치게 남용되는 광경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런 전력이 있다고 해서 공권력 자체가 존립 근거를 잃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안전한 나라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나는 자정 넘어 집에 들어오는 딸들을 혼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는 여성 혼자 새벽녘에 거리를 다니는 일을 상상하기 힘들다. 한국의 치안상태는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1987∼91년 나는 미국 뉴욕의 할렘가에 살면서 치안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마약소굴이던 우리 동네에는 신고를 받아 경찰이 출동하더라도 여럿이 무리를 지어야 동네에 들어올 정도로 위험했다. 한밤중에 총격전이 벌어져 창문을 뚫고 총알이 들어올까 봐 벽에 등을 대고 총격전이 끝나길 기다린 적도 있다. 다음 날 아침 우리 집 앞 거리에는 탄피가 두 주먹 분량으로 쌓여 있었다. 총알이 실제로 창문을 뚫고 들어와 집 천장에 박혀 사진으로 ‘상흔’을 가린 적도 있다. 경찰의 도움 없이 4년간 할렘에서 무사하게 살아남은 이유는 이웃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우리 가족을 보호해줬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경찰에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은 일제강점기 경찰의 만행, 독재정권 시절 경찰력의 남용과 같은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하지만 전력을 감안한다고 해도 한국 경찰관들은 지나치게 고생하는 것 같다. 잘 아는 경찰관은 “지구대에서 술 먹고 소변이나 안 봤으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한 적이 있다. 물론 부정부패에 연루되는 경찰관들이 일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반복되는 당직과 비상근무 탓에 가정생활이 파탄 나는 위험도 감수한다. 이제 국민이 자신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자발적으로 공권력에 힘을 실어줄 때가 된 것 같다. 공권력이 바로 서지 않을 때 가장 많이 손해 보는 쪽은 국민 자신이다.

인요한(존 린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