펍코크니 문화 섭렵… 런던 이웃들이 ‘토박이’ 대우
‘올드 저스티스’의 김진욱 씨는 “부모님과 아내의 전폭적인 지원과 믿음, 초창기부터 묵묵히 일을 도와 준 동생(진현 씨)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영국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된다”며 웃었다. 런던=박희창기자 ramblas@donga.com
분홍색 책가방을 멘 꼬맹이 세 명이 쪼르르 가게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 가게 앞에 놓인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는다. 손에는 물이 담긴 맥주잔이 들려 있고, 입에는 하늘을 닮은 파란 빨대가 물려 있다.
“셋이 자매예요. 막내는 이제 아홉 살인데 다섯 살 때부터 봤어요. 애들이 나만 보면 자꾸 젓가락 3세트만 달라고 해서 미치겠어요. 자기 친구들 줄 거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아이스크림 파는 차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이들이 잔을 내려놓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오늘은 저희들 돈으로 사먹지만 아이스크림 차 앞에서 만나면 제가 사줘야 돼요. 그리고 나중에 아이들 아빠한테 말하죠. ‘야, 아이스크림 값 내가 냈어.’ 그러면 아빠가 낚시해서 잡은 장어를 갖다 주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들고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자기들끼리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
○ 너무나 영국적인 그곳의 이방인
1 ‘올드 저스티스’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블루 플라크(Blue Plaque)’. 건물과 관련된 유명인이나 사건 등을 기념하기 위해 붙이는 표시다. 이곳에서 비틀스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가 영화 ‘스타 탄생’(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과 싱글 ‘노 모어 론리 나이츠(No More Lonely Nights)’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고 적혀 있다. 2 30년 넘게 매일 퇴근 후 ‘올드 저스티스’를 찾는 한 손님. 그는 “전에는 이 펍이 바빠 보인 적이 거의 없었는데, 당신이 해냈다”고 김 씨를 자랑스러워했다. 3 ‘올드 저스티스’ 전경.
그의 말처럼 펍은 영국인의 삶과 문화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 영국 맥주와 펍 협회(BBPA)에 따르면 현재 5만4000여 개의 펍이 영업하고 있으며 영국 성인 10명 중 8명은 자신을 ‘펍에 자주 가는 사람(pub goers)’으로 여긴다. 영국 인구의 약 30%인 15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펍을 찾는다.
특히 번화가가 아닌 조그만 동네에 있는 펍 주인은 대부분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 그리고 자신의 친구들이 가게를 찾아준다.
우리에겐 함께 모여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곳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영국인에게 펍은 단순한 술집 이상이다. 지극히도 영국적인 문화와 그들의 삶이 펼쳐지는 곳이다. 김 씨는 2006년 5월부터 펍을 운영해오고 있다.
“잘 몰랐으니까 시작했죠. 이렇게 영국적인 것인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예요. 중국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안 하는 장사가 없잖아요. 하지만 아직도 영국에서 중국 사람이 하는 펍은 없어요.”
하지만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어떤 할아버지는 가게에 들어와 바 뒤에 서 있는 절 딱 보더니 ‘난 여기가 싫어’라며 바로 돌아서서 나가더라고요. 왜 바 뒤에 백인이 아닌 동양인이 있냐 이거죠. 어떤 애들은 와서 아무것도 안 묻고 바로 기네스 한 잔 하고 치킨 초우멘(chow men·중국식 볶음면) 하나 달라고 하는 거예요. 중국 사람이다 이거죠. 많이 싸웠어요.”
후에 알았지만 김 씨가 얼마나 버틸지를 두고 동네 사람들끼리 내기도 했다. 그는 끝까지 ‘군인 정신’으로 버텼다. 취사병이라 총은 얼마 잡아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자기들은 사람이고 난 동물인가요? 무시하려고 들 때마다 내가 너희보다 강하고, 돈도 많고,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어요. 먹는 음식이 조금 다르지, 상처 나면 똑같이 새빨간 피가 나온다고 끊임없이 말했죠. 저도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는 데 한 2년 걸리더라고요.”
2년이 지나서야 겨우 동네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존중한다(respect)’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손님도 처음보다 3배 이상 늘었다. 3억 원에 이르는 주택담보대출도 4월에 다 갚았고, 이제는 종업원도 8명이나 된다. 이른 아침부터 직접 식재료를 구입하고 요리부터 설거지까지 혼자 하던 것에 비하면 ‘여유’도 생겼다.
얼마 전에는 취객 3명과 가게 앞에서 시비가 붙었다. 그들은 영업시간이 끝났는데도 막무가내로 술을 내놓으라며 가게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 명이 먼저 김 씨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치고받으며 싸움이 커지자 동네 사람들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달려 나왔다.
“취객들은 영국 사람이고 난 동양인인데도, 얘들이 내 편인 거예요. 나중에 고맙다고 공짜로 맥주 한 잔씩 돌렸죠.”
아내는 김 씨에게 “이제 제발 그만 접자”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대답한다. “나 한국에서 군대 나온 남자야. 무시하지 마.(웃음)”
○ 펍, 그곳에는 그곳만의 룰이 있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1946년 발표한 에세이 ‘물 밑의 달(The Moon Under Water)’에서 ‘이상적인 펍의 조건 10가지’를 제시했다. ‘펍은 대화를 나누기 좋게 조용해야 하고, (요즘엔 TV가 있지만) 라디오나 피아노가 있어서는 안 된다’ 등 구체적이다. 그중에는 ‘바텐더는 모든 고객의 이름과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도 포함돼 있다.
김 씨는 그런 것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맥주 따르는 것부터 하나하나 배웠죠. 맥주잔 위의 거품을 ‘헤드’라고 하는데, 이것도 7, 8mm 정도로 딱 맞춰서 따라줘야 돼요. 그러면 ‘굿 파인트(약 500cc 분량)’라며 좋아하죠. 여기 사람들은 잔을 1mm라도 덜 채우면 다시 채워달라고 해요.”
고객의 이름과 선호보다 바텐더가 더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라운드(round)’다. 우리는 흔히 ‘쏜다’고 하며 그날 술값을 한 사람이 모두 계산하지만 영국인은 펍에서 한 순배마다 차례로 술값을 쏜다. 일행 중 한 명이 첫 잔을 사면 두 번째 잔은 다음 사람이 산다.
“‘누구 순서지?(Whose round is it?)’ 술 먹다가 꼭 나한테 물어봐요. 게다가 이 친구들은 각각 먹는 술이 다 달라요. 우리는 처음엔 기네스를 먹었더라도 두 번째는 스텔라를 먹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이 친구들은 자기가 고집하는 술이 정해져 있어요. 그것도 기억하고 있어야죠. 다른 맥주는 공짜로 준다고 해도 안 먹어요.”
펍 주인에게는 손님을 받지 않을 권리도 있다.
“내가 한 사람한테 ‘넌 제명이야(You're barred)’ 그러면 그 친구는 내가 이 펍을 운영하는 동안에는 이곳에 다시는 못 와요. 안 나가고 있으면 경찰을 부르죠. 경찰도 ‘제명(barred)’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쓰면서 나가도록 하죠. 법이 보호해 줘요.”
펍 라이선스도 따기가 쉽지 않다. 시험도 봐 70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주류 판매와 음식 조리 면허는 물론이고 생맥주를 따라내는 파이프라인에 박테리아가 번식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주류 면허를 주는 조건 중 하나가 주인과 그 가족이 알코올 중독이 아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촌인가까지 확인할 거예요. 영국에서는 펍 주인이라고 하면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알코올 중독이 아니고, 마약과 관련해서 깨끗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줘요. 한국에서야 그냥 술집 주인이지만…. 하하.”
○ 폴 매카트니 뮤직비디오도 촬영한 곳
“비틀스 일본 팬클럽 총회장이 찾아와 가격을 많이 쳐줄 테니 가게 유리창을 자신에게 팔지 않겠냐고 한 적도 있었어요. 싫다고 했죠. 여긴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이잖아요. 의미가 있는 만큼 이 건물도 예전 모습 그대로 지켜가고 싶어요.”
매카트니의 노래 제목처럼 이제 그에게 외로운 날들은 끝났다. 가게 손님이자 이웃 친구들은 이제 말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서 마셨고, 우리 아버지가 마셨고, 내가 현재 마시고 있고, 내 애도 여기서 맥주를 마실 거야. 킴, 네가 그때까지 이곳에 있기를 바라.”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까요?(웃음) 일전에 어린 친구들이 길거리에서 헤매는 것이 안타까워 가끔 말동무가 돼 줬어요. 그때마다 ‘열여덟 살이 되면 내가 너의 첫 맥주를 사주겠다’고 말했는데, 이제 애들이 하나둘씩 찾아와요. 아, 그리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저처럼 코크니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코크니는 런던의 동쪽에 거주하는 노동자 계급과 그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를 뜻한다. 영국 사람들도 코크니 사전을 따로 찾아봐야 할 정도로 ‘난해한’ 말이다. 스텔라 맥주는 ‘넬슨 만델라’, 20파운드는 ‘스코어(score)’라고 말한다.
그의 코크니 강의가 템스 강 위로 노을이 물들 때까지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이, 존!”
“하이, 리즈!”
런던=박희창기자 rambl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