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식의 역사/소피아 로젠펠드 지음·정명진 옮김/424쪽·1만7000원·부글북스
앤서니 애슐리 쿠퍼가 1711년경에 그린 판화 ‘공통감각(sensus communis)’. 오늘날 ‘상식(common sense)’의 어원이 된 공통감각은 고대 로마시대에 나온 개념으로, 한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가치와 믿음을 일컫는다. 부글북스 제공
저자는 현대 정치에서 ‘상식’이라는 개념의 비중이 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과 사회의 진로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상식’이다. 모두가 한 표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선거제도는 바로 이 ‘상식’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국가의 운영에 관한 중요한 결정은 상당한 전문지식과 도덕적 소양을 갖춘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상식’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존립하고, 특히 상당수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양원제가 운영되는 것은 바로 이 ‘상식’에 근거한다.
대선·총선·보선 때마다 여야와 보수·진보를 적절히 안배하여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국민의 현명함을 보면, 잘난 척하는 지식인이나 정치가, 자본가의 ‘신중한’ 판단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인의 ‘상식’에 따라 한국사회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뉴타운정책, 수도 이전, 4대강, 신공항, 무상급식 등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마다 정파적 이익을 위해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의 포퓰리즘적 선동에 휘둘리는 국민을 보면 ‘상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왼쪽)
그러나 ‘상식’이 늘 진보의 편은 아니다. 필라델피아를 거쳐 다시 대서양을 건너온 ‘상식’은 혁명의 도시 파리에서 복고적 사상과 결합한다. 프랑스혁명 발발 2, 3년 만에 전통적 가치들과 생활방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교회와 국왕, 마을의 공동체 정신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상식’에의 호소가 힘을 얻었다. 물론 혁명을 주도한 자들도 ‘상식’에 호소하고 있었다. 이후 ‘상식’은 모든 정치적 논쟁에 동원됐다.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견해가 대중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고 이를 위해 정치가와 대중이 공유하는 ‘상식’이 가정되고 강조됐다. 진보든 보수든, 우파든 좌파든 적어도 대중의 힘을 필요로 하는 한 ‘상식’은 포기할 수 없는 무기가 됐다. 노예제도, 여성운동, 민족주의 등 정치사에서 벌어진 주요 논쟁마다 그 찬반 양측은 모두 ‘상식’에 의존해 자신의 생각을 주장했다.
‘상식’은 죽음을 모르고 출몰하는 영혼과 같다고 생각하는 저자는 대중의 ‘상식’에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던 칸트에게 호의적이지만 칸트의 후예들은 다시 정치로 나아갔다. 저자는 그중 해나 아렌트에게서 작은 희망을 찾는 듯하다. 아렌트에게서 ‘상식’은 사람들을 현실세계와 연결해 주고,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도록 해주며, 또한 공적 생활의 한계를 정해준다는 것이다. 미약하지만 이것은 미워도 버릴 수 없는 ‘상식’의 폐해를 막을 방법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이다.
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