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준 산업부 차장
총수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금년에 50주년을 맞았다. 이제 향후 50년을 내다볼 때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인가 많이 고민해 달라”는 대통령의 발언에 일부 참석자는 얼굴이 굳어졌다. 제 역할을 못하는 전경련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시점이라 더욱 그랬다.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도 기자 브리핑에서 “‘전경련이 향후 어떤 식으로 할지…’라는 대통령의 말씀을 의미 있게 들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발언 이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 인사 가운데 정병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LG그룹에 몸담고 있을 때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전형을 보여주며 젊은 사원들의 롤 모델로 꼽혔다. 1969년 LG화학의 전신인 ㈜럭키에 입사해 줄곧 재무 쪽에서 일한 정 부회장은 특히 돈 빌리기에 강했다. 대출해줄 때까지 끈기 있게 매달려 금융권에서 ‘독일병정’으로 통했다. 재무 전문가 특유의 꼼꼼함과 신중함 외에 돌파력과 수완까지 갖춘 그는 화학, 반도체, 상사, 전자 등 LG 주력 4개 계열사의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냈다.
그러던 그가 전경련 2인자로 변신한 뒤의 행적은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들에게 강한 내유외강(內柔外剛)으로 요약된다. 각종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재계 길들이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무리하게 정관계 로비에 나서려다 문건이 새나가 곤욕을 치렀다. 정 부회장은 로비계획에 대해 “전경련이 해야 하는 일 아니냐”고 강변했다. 그러나 문건이 새나갔다는 사실 자체가 전경련 내부기강이 무너졌음을 증명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정 부회장이 새 전경련 회장을 선출하기로 예정된 시기를 불과 한 달 앞둔 올해 1월 대규모 인사를 단행한 것도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상당수 임원을 측근으로 채웠다는 얘기도 나온다. 유관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도 대규모 인력 감축을 하면서 부회장이 연구원 공동대표 자리를 차지하는 욕심(?)을 부렸다.
그러는 사이 전경련의 위상은 점점 추락했다. 국회로부터 해체 압박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회원 대기업들의 신망을 잃어갔다. 일본이 2002년 경단련(經團連)과 일경련(日經連)을 경단련으로 통합한 것처럼 전경련과 대한상공회의소를 합치자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전경련은 1년에 네 번 개최하는 회장단 회의를 8일 연다. ‘향후 50년 전경련의 진로’가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요즘 눈에 띄게 ‘권력 피로(Power Fatigue)’ 증세를 보이는 정 부회장이 짐을 덜 수 있을지도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