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광야서도 40년 영롱한 ‘아침이슬’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작은 연못’과 ‘백구’를 담고 있는 1972년 양희은의 두 번째 앨범 재킷의 사진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얘기해 주고 있다. 커트 머리에 평범한 셔츠에다 올이 풀어진 청바지, 그리고 맨발로 굳건한 나뭇등걸에 올라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저 젊은 대학생을 보라. 이 재킷 사진은 역사에 걸터앉아 미래의 하늘을 향해 외치는 이 젊고 새로운 세대의 섬세한 거역인 것이다.
스스로 몸을 사른 청계천의 한 노동자의 피맺힌 외침으로 열린 1970년대의 벽두에, 이들의 목소리는 시대의 ‘아침이슬’이었다. 폭력적으로 3선 개헌을 관철한 제3공화국이 영구 집권을 향해 마지막 걸음을 떼던 1971년 김민기와 함께 양희은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애상과 영탄으로 점철되었던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경의에 찬 눈으로 이들을 쳐다보았다. 같은 해 바로 뒤이어 녹음된 김민기의 데뷔 앨범 속 목소리가 침잠과 고뇌의 무늬를 자아낸다면 거칠 것 없는 양희은의 목소리는 도전적인 패기와 환원될 수 없는 젊음의 눈부신 상징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1970년대 후반의 암흑기를 포크 음악인 이주원과 더불어 동행하며 ‘내 님의 사랑은’과 ‘한 사람’, 그리고 ‘들길 따라서’ 같은 주옥같은 명곡을 토해냈을 때 처녀는 여인으로, 서사는 서정으로 이행했다. 그리고 1980년대의 정오에서 하덕규와 함께 ‘한계령’에 올랐을 때 우리의 대중음악사는 가장 정결한 허무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91년 여름,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양희은은 미국의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어쿠스틱 기타 하나를 달랑 들고 날아온 이병우와 단출한 앨범 하나를 조용히 분만해 낸다. 이 앨범에 이르러 양희은은 결코 선율과 리듬의 겉치레가 아닌, 오히려 이병우의 음악과 맞겨루는 노랫말의 경지에 올라섬으로써 한국 모던 포크의 역사에 또 하나의 빛을 새겨 넣는다.
이 앨범은 목소리와 기타만으로 이루어진,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은, 감정을 강요하진 않지만 어느새 마음을 뒤흔드는 투명한 2중주집이다. 이병우의 아르페지오 기타와 눈을 맞추며 양희은은 텅 빈 객석을 향해 독백을 시작한다. “‘그해 겨울’ ‘그리운 친구에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저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가”라고.
음표는 경박하게 동요하지 않으며 리듬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화성은 식별할 필요가 없다. 타올랐던 젊음의 함성도 그리고 삶의 허무함도 증류되어 버린 이 공간엔 모든 것이 떠나고 최후로 그의 음악의 핵이 오롯이 남아 우리를 지긋이 응시한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