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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플러스/이문원의 쇼비즈워치]아카데미 한국대표가 ‘고지전’? 글쎄…

입력 | 2011-09-08 16:28:00



제84회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부문 한국 출품작이 결정됐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 8월24일 장훈 감독이 연출한 6.25전쟁 소재 영화 '고지전' 출품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번 출품 과정에서 후보로 등록한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 나홍진 감독의 '황해', 전재홍 감독의 '풍산개', 강형철 감독의 '써니'와 '고지전' 등 총 6편이었다.

이미 예견됐던 일이지만, 출품작 발표와 함께 논란도 시작됐다. 다른 5편에 비해 '고지전'이 과연 '아카데미용'으로 적합한 영화가 맞느냐는 것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측은 대부분 끝까지 경합을 벌인 '황해' 쪽 손을 들어주고 있다.

'황해'의 "지나치게 잔인한 폭력성"이 아카데미상에 맞지 않았다는 영화진흥위원회 측 설명에 대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허트 로커' 등 지난 아카데미상 작품상 수상작들 예를 들며 반박하는 포스트들도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실 낙선이 아니라 당선이유다. '고지전' 선정에 대해 영화진흥위원회 측은 "한국전쟁을 다룬 소재가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 자체로는 그럴싸하게 들린다. 세계인들이 한국에 대해 가장 폭넓게 인지하고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6.25전쟁 또는 남북분단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익숙한 정보가 좋은 정보라는 논리다.

그런데 여기서 기시감이 일 수 있다. 한국전쟁, 남북분단 소재가 유리하다 판단해 출품을 결정했다는 설명은 이전에도 들어본 것 같기 때문이다. 이는 그냥 '느낌'상 그런 게 아니다.

실제로 지난 7년 간 3번이나 영화진흥위원회 측으로부터 그런 설명을 들어봤을 수 있다.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 선정 때, 2005년 '웰컴 투 동막골' 선정 때, 그리고 2008년 '크로싱' 선정 때다. 그리고 그 3편은 모두 후보지명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쯤 되면 적어도 "한국전쟁을 다룬 소재가 유리"하리란 판단은 무리라고 보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 6.25전쟁, 남북분단 소재는 21세기 들어 벌써 4번째 아카데미상 측에 넘겨지게 됐다.

대체 왜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 걸까. 이유는 단순하다. '그거밖에 팔 게 없기 때문'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세계 이목을 끄는 건 '북한'이지 '남북분단'이 아니다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후보지명은 영화 자체의 퀄리티나 방향성보다 출품 국가 이미지에 좌우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기존 영화 패권국들인 프랑스, 이태리,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더 쉽게 후보지명을 얻어내곤 한다.

반면 그런 프리미엄이 없는 국가들 입장에선 철저히 국제적 이목을 집중시킨 자국 정치·사회 상황을 팔아 관심을 끌어내는 방법 밖에 없다. 실제로 21세기 들어 보스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이 그런 식으로 후보지명을 얻어낸 바 있다.

그런데 한국은 그 부분에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6.25전쟁과 남북분단 상황밖엔 팔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몇 번이고 실패하더라도 같은 선택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 외엔 붙잡을 지푸라기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게 왜 안 팔리는지 이해조차 못하고 있다. 일단 북핵 미사일 등 북한 관련 이슈가 터졌다하면 전 세계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몇 번이나 후보지명에 실패해도 영화의 장르나 콘셉트, 연출, 연기 따위에서나 그 이유를 찾지, '설마' 6.25전쟁과 남북분단 소재 자체에 문제가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

물론 북한 문제는 여전히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국제정치 사안이 맞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세계가 관심을 갖는 건 남북분단 상황이 아니다. 상식을 초월한 독재국가 북한과 그 지배자 김정일에 국한돼 있다.

한국 측 입장이 포함된 남북분단의 비극은 우리나 중요시 여기지 해외에선 북한의 만행밖에 눈에 들어오질 않는단 얘기다. 그러니 자연 6.25전쟁도 딱히 관심이 안 가는 부분이 된다.

국제정치 상황에 딱히 민감하지 않은 해외 영화인들 입장에서, 한국은 북한과 '정치적으로만' 관련을 맺고 있는 나라다. 그 외엔 그저 웬만큼 잘 사는 아시아 국가 이미지 정도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우 악질적인 이웃을 지녀 고생하고 있는, 웬만큼 잘 사는 아시아 국가다. 그러니 아무리 북한을 끼고 팔려 해봤자 헛수고라는 것.


●특색 없었던 대만이 먼저 아카데미상 진출한 까닭

한국은 사실 아카데미상 진출을 놓고 훨씬 이전부터 뭔가 다른 방향을 모색해봤어야 옳다. 그리고 조금만 외국어영화상 후보작 및 수상작들을 연구해 봐도 그 '다른 방향'이 쉽게 탐지되는 상황이다.

일단 아시아 국가의 아카데미상 진출 상황을 돌아보자. 한국은 엄밀히 말해 대단한 후발주자다.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 대만, 홍콩, 인도, 심지어 베트남까지 모두 진즉에 외국어영화상 후보지명은 한 두 번씩 다 받아봤다.

그런데 여기서 대만이 왠지 수상하다. 대만 역시 한국처럼 '팔 게 없는 나라'인 건 마찬가지다. 환경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오히려 한국보다 더 절박했으면 절박했지 나을 건 없다. 그런 대만은 대체 어떻게 한국보다 먼저 아카데미상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대만영화사상 최초로 아카데미상 진출을 이룬 이안 감독의 연이은 외국어영화상 후보지명작 '결혼피로연'과 '음식남녀'를 돌아보자. 이 두 영화의 특징은, 사실 특징이 없다는데 있다. 정치·사회 상황 묘사는커녕 국지색 자체가 지극히 엷고, 사실상 아시아 어느 국가로 배경을 옮겨놓아도 그대로 소화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인물과 얘기 틀을 갖추고 있다.

어떻게 그런 틀이 나올 수 있었을까. 바로 두 편의 영화가 '중산층'의 윤리와 사고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사실상 어느 국가건 대개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어서다. 그러니 자연 보편성 확보 및 정서적 공감대를 넓어지고, '외국영화'란 편견에서 벗어나 보다 부담 없이 세계 대중에 어필할 수 있다. 장점이 많다.

그리고 아카데미상은 바로 이 중산층의 윤리와 사고를 다룬 영화들을 지극히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외국어영화상 부문으로 집중시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지난 3년 간 수상작 '인 어 베러 월드' '비밀의 눈동자' '굿'바이' 등은 모두 장르와 방향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중산층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나아가 지난 십 수 년 간 외국어영화상 부문에서 이변을 일으켰던 시상 사례들은 대부분 될성부른 화제작들이 이 같은 중산층 소재 영화들에 '당한' 경우였다. 1994년 '패왕별희'가 '아름다운 시절'에 패한 경우, 2009년 '바시르와 왈츠를'이 '굿'바이'에 패한 경우 등이 예다. 보편과 공감의 위력은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


●중산층 윤리와 사고 다룬 영화들을 밀어줘야

이제 2002년 이후 한국의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출품작들을 돌아보자. '오아시스' '태극기 휘날리며'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웰컴 투 동막골' '왕의 남자' '밀양' '크로싱' '마더' '맨발의 꿈' 중에서, 중산층 윤리와 사고를 다룬 영화는 아무리 봐도 '밀양' 단 한 편뿐이다.

그나마 '밀양'은 꽤나 민감한 종교적 소재를 다뤄 기독교 국가 미국 입장에서 껄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런 '밀양'을 빼버리고 나면 사실상 아카데미상 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카데미상의 속성에 대해 더 깊은 이해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거창한 규모와 주제, 국지적 특색, 대단한 세계영화제 수상실적은 없더라도, 오히려 '질투는 나의 힘' '연애의 목적' '가족의 탄생' '밤과 낮' 등 중산층 윤리와 사고의 일면을 다룬 소박한 영화들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었으리란 점을 인지해볼 필요가 있다. 프레임을 아예 달리 해봐야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끝으로, 아카데미상이 대체 무엇이길래 우리가 자존심 상하게 이것저것 비위를 맞춰주고 연구까지 해가며 대응해야 하느냐는 입장에 대해선, 과연 아카데미상처럼 세계 120여 개국에서 방영되는 강력한 영화 광고탑이 세상에 또 있는지 반문해보고 싶다.

아카데미상 후보로만 지명돼도 벌써 해당영화 수출가와 수출국가가 대대적으로 늘어나고, 수상에까지 이르면 세계3대국제영화제 수상작보다 몇 배 덩치가 불어난 상품으로 거듭나버린다.

거기다 아카데미상은 한 번 인정한 국가 영화는 꾸준히 다시 '모셔오는' 모습까지 보인다. 영화산업 규모나 체계 면에서 우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알제리 등도 한 번 벽이 무너지자 여타 영화들까지 계속 아카데미상에 입성함으로써 자국영화 국제경쟁력을 꾸준히 키워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야말로 의리 있고 충성도 높은 광고탑인 셈이다. 그러니 이런 상에 대해 연구하고 대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야말로 무책임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한류 붐이다 뭐다 난리가 나고 있는데, 한때 한국대중문화산업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던 영화 장르는 오히려 현 시점 한류의 천덕꾸러기처럼 치부되는 현실이다. 국제적으로 볼 때 수준 낮다고 그리도 욕하던 TV드라마, 아이돌 음악보다도 훨씬 안 팔리고 있다.

이런 현상의 기저에는, 어쩌면 아카데미상과 같은 최강의 광고탑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온 상황이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상황이겠지만 어찌됐건 '고지전'이 좋은 성과를 내주길 기대하고, 대(對)아카데미상 전략 중추인 영화진흥위원회 측에 더 면밀한 대책과 대범한 실천을 요구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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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