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최평균 아파트 경비원, 수필가
내가 하던 사업이 10여 년 전부터 곤두박질치더니 급기야 모든 것을 잃고 더군다나 혹 같은 부채를 떠안고 내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했었다. 결국 가족을 떠나 이곳저곳 기웃대다 건설 현장의 노무자로 몇 년을 견뎠다. 그러다가 작년 초에 면책 판결을 받고 여름부터 경기도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로 일하고 있다. 다른 동료들은 박한 월급의 경비직이 인생의 최막장이라 말을 하나 고된 일과뿐만 아니라 복지나 환경이 극도로 척박한 건설노동을 경험한 나에게는 한 단계 발전된 풍요롭고 고마운 직장이라 생각하고 있다.
내가 시절이 좋을 때는 가족들과 여행도 자주 가고 각종 기념일을 빼놓지 않고 챙겼으며, 특히 결혼기념일은 그냥 넘기질 않았다. 정말 힘들 때에도 두 아들의 지원으로 SG워너비의 콘서트를 관람하러 갔으니 그나마 참 행복한 나날을 지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사연을 듣고 나는 곧바로 결혼 30주년의 이벤트 목표를 학 1000마리의 포획으로 정했다. 500원짜리 1000개면 금액으로 50만 원이니 국내 여행 2박 3일 정도의 경비로는 적당하고 부담도 적고 학 1000마리의 의미도 특별하니 가난한 나의 진주혼식 이벤트로는 손색이 없을 터였다.
다음 날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내 계획을 말하였더니 모두 좋은 생각이라고 기뻐하였다. 아내는 따로 1000마리의 학을 모아서 이벤트의 질을 높이겠다고 곧바로 저금통을 마련하여 학을 사냥하고 있으며, 두 아들도 500원짜리를 구해 적극 후원하고 있다. 기념일까지는 800여 일 남았으니 하루 한 개 이상씩만 모은다면 내 계획은 큰 무리가 없는 것이다.
전에는 가족들과 여행이나 낚시 등 여가를 알차게 즐기며 살았는데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실탄을 대부분 상실해 버린 지금은 행복에 드는 원가는 저렴해졌으나 질은 결코 낮아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항상 공정하셔서 나의 경제적 무장을 해제하시더니 그 대신 값싸고 질 좋은 행복을 내게 배려해 주시는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게 어찌 사람의 의지대로 되겠는가. 내가 어느 순간 명을 다할 줄 모르는데 원대한 꿈을 버킷리스트로 잡았다가 그 계획에 도리어 볼모로 잡혀 작은 행복의 부스러기들을 놓쳐 버린다면 인생의 후반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그 계획을 다 이루기도 전에 불행을 당한다면 버킷리스트는 한갓 계획으로만 그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나는 되도록 기간이 짧고 크기는 작지만 차별화되고 가슴이 따뜻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하며, 그 계획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또 다른 짧고 작은 다음의 버킷리스트를 마련할 뿐이다.
최평균 아파트 경비원,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