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T 모범사원 표창받은 협력사 출신 이형일 씨
동국대 1학년 시절, 겁이라곤 없을 때였다. 1등이었다. ‘만세’ 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동시에 발이 미끄러졌다. 기우뚱거리다 떨어지면서 엉덩이에 바위가 닿았다. ‘텅’ 튕겨나가며 정신을 잃었다. 깨어 보니 병원이었다. 골반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수술을 받으면 나아지나요. 선생님?” 어떤 의사도 좋아진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병원 세 곳을 돌았지만 모두 똑같은 말을 했다. “나라면 그냥 다리를 절며 지내겠어요.” 의사들은 내게 불구로 살기를 권했다.
이형일 씨(42·사진)는 문학도였다. 왼쪽 다리를 절어도 글 쓰는 건 문제없었다. 그런데 자포자기했다. 고향인 광주광역시로 내려왔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학대에 가 전도사가 됐지만 벌이는 시원찮았다. 그래도 그를 믿어주는 아내를 만났다. 마음을 다잡았다. 잘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KT 협력업체의 인터넷 설치기사가 됐다. 뛸 필요도 없었고, 큰 힘을 쓰는 일도 아니었다. 집집마다 인터넷선을 연결해주는 데 다리를 저는 건 별 흠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말썽꾼 손님들 덕에 인생이 달라졌다. 어느 날 한 집을 찾았다. 전화가 안 된다고 몇 차례 신고한 집이었다. 거실의 전화기는 멀쩡했다. 고장 난 전화기를 주워 자기 방에 설치해달라고 한 할머니가 문제였다. 돌아 나오려 했다. 그때 할머니가 말했다. “큰아들이 내가 거실에 있는 게 보기 싫대.” 이 씨는 할머니가 자기 처지 같았다. 나가서 싸구려 전화기를 하나 사 할머니 방에 달았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할머니는 손수건을 꺼냈다.
한번 소문이 나자 귀찮은 손님은 다 이 씨 차지였다. 냉장고가 작동이 안 된다며 KT로 전화하는 아주머니, 벽 공사를 하다가 인터넷선까지 함께 묻어버린 고시원 아저씨…. 다들 뭔가 모자란 사람들 같았다. 회사는 그들을 ‘문제 고객’으로 분류했지만 이 씨는 그들에게서 자기 모습을 봤다. 그래서 가전업체에 애프터서비스(AS)를 신청해주고 벽에 구멍을 뚫어 인터넷선을 빼내줬다.
그러면서 큰딸이 태어나고 아들 둘을 봤다. 어느덧 불혹을 넘겼다. 하는 일은 변한 게 없는데 주변에선 ‘실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때 KT에서 공채 공고를 냈다. 협력사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원서를 냈다. 채용 기준은 협력업체 시절 실적이었다. 냉장고를 고쳐달라던 아주머니, 전화기를 사다 드렸던 할머니, 그 사람들이 소개해 준 사람들이 다시 소개해 준 사람들…. AS를 하면서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도 가입해준 그들이 힘이 됐다. 2007년에는 KT 협력사 직원 가운데 전국 영업실적 3위, 2009년엔 KT가 협력사 직원을 포함해 뽑은 ‘전국의 영업달인 5인’이 됐다.
지난해 9월 정식으로 KT에 입사했다. ‘41세 신입사원’이었다. 입사 동기의 평균 나이는 33세. 몸이 불편한 사람도, 나이 사십이 넘은 사람도 이 씨 혼자였다. 하지만 빛나는 실적도 그 혼자였다. 입사 뒤 8개월 동안 얻은 고객들의 ‘칭찬의 소리’만 68건, 영업실적은 동료들 평균의 30배가 넘었다.
회사는 그런 이 씨에게 ‘액션스타 대상’을 줬다. 모범사원 표창이다. 이석채 KT 회장은 수상자인 이 씨를 보고 “우리 회사에 이런 훌륭한 사람이 있었느냐”며 깜짝 놀랐고 서유열 홈고객부문 사장은 그를 초청해 임원들에게 강의하게 했다.
여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작은 아파트도 하나 생겼고 자녀 교육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불영폭포에서 떨어진 뒤 이 씨는 달팽이보다도 훨씬 느린 속도로 그 폭포를 다시 올랐다. 1m에 4년 넘게 걸린 셈이었다. 그러고는 또 한 번 1등이 됐다. 그는 다짐했다. ‘이젠 다시 떨어지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