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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의 음식이야기]바나나

입력 | 2011-09-15 03:00:00

조선시대 차례상에 놓았던 열대과일?




요즘은 추석 차례상에 바나나를 놓는 집이 적지 않다. 하지만 바나나는 전통적으로 제수로 쓰는 과일이 아니어서 전통예법에 어긋난다며 집안 어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바나나는 열대과일이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예전 조상님들은 바나나를 구경도 못했을 것이고 또 바나나라는 과일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바나나가 있었고 차례나 제사상에 놓는 제수용 과일로 쓰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 이후의 옛글을 모은 ‘동문선(東文選)’에 고려 말의 충신 야은 길재에게 바치는 제문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바나나가 보인다. 성종 때 도승지를 지낸 손순효가 쓴 글이다.

‘금오산과 낙동강은 어제와 같은데 선생은 어디에 계시는지/초황(蕉黃)과 여단(x丹)을 바치오니/영령이시어 제물을 거두어 드시기 바랍니다.’

제물로 준비했다는 초황은 파초나무에서 열리는 노란 열매로 바나나를 말하는 것이다. 여단은 양귀비가 좋아했다는 열대과일인 붉은 여지(리치)다. 조선 중기 명종 때의 성리학자인 기대승의 ‘고봉집(高峯集)’에도 노란 파초 열매인 초황과 붉은 여지인 여단을 제사상에 올렸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 밖에도 조선 선비의 문집에 바나나와 여지를 제사상에 올렸다는 기록은 많다.

문헌으로만 보면 조선 초기에도 이미 열대과일인 바나나와 여지를 수입해 먹었고 또 제사를 지낼 때도 사과나 배처럼 제수용 과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기록만 보고 실제로 제사에 바나나와 여지를 제물로 올렸다고 주장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 이유는 제사상에 바나나와 여지를 올렸다는 조선 선비의 글들이 대부분 당나라 시인 한유가 쓴 시에 나오는 ‘빨간 여지와 노란 바나나를 다른 음식과 함께 사당에 올려 제사를 지내노라’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나나와 여지라는 열대과일을 실제로 제사상에 차린 것인지, 아니면 실물을 놓지는 않고 한유의 시를 인용만 한 것인지가 명확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 초기에도 이미 열대과일인 바나나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제사를 지낼 때 실제로 바나나를 놓았을 개연성도 크다. 바나나를 수입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같은 열대과일인 여지는 조선시대 초기에 중국에서 많이 들여왔기 때문이다. 연산군 때까지만 해도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여지를 가져 왔으니 바나나 역시 무역품목에 포함돼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연산군 이후인 중종 때부터는 폭군이 좋아한 과일인 데다 지나친 사치품목이라며 열대과일은 극소량을 제외하고는 수입을 금지한다.

어쨌든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열대과일인 바나나가 조선 초기에 있었고 더군다나 제사상에 올리는 귀한 과일로 묘사돼 있다. 그러니 차례상에 바나나를 놓는다고 해도 전통예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올해 여름철 비가 많이 내려 바나나를 제외한 과일 값이 모두 올랐다고 하니 떠오른 생각이다.

참고로 지금은 바나나가 값싸고 흔한 과일이지만 고대에는 세계적으로 진귀한 과일이었다. 이 때문에 로마시대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서 인도의 현자들이 먹는 열매라고 했고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서는 바나나를 ‘천국의 나무’로 그렸다.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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