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승보다 힘든 20패…장명부 두번 전부초기리그·약팀 주력투수 잦은 출격 원인현대야구 실력 안되면 등판 자체 불가능불명예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갖춰야
굳이 확률을 따지지 않더라도 20승 만큼 어려운 게 20패다. 시즌 20패 이상은 장명부가 단 2번 기록했을 뿐이다. 하지만 장명부는 83년 시즌 최다 30승이라는 깰 수 없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스포츠동아 DB
■“겁없는 에이스만 가능하다”
위풍당당 20패?
16일 현재 프로야구 최다승 투수는 윤석민(KIA·16승)이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도 꿈의 20승에 대해 “욕심이 났지만, 사실상 힘들어진 것 같다”고 말한다. 시즌 20승은 프로야구 통산 11명의 투수가 총 15번을 기록한 것이 전부다. 반대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최근 20패 투수가 나올지가 관심사였다.
그 주인공은 제레미 거드리(볼티모어). 거드리는 5일(한국시간)까지 6승17패를 기록하며 20패에 다가섰다. 하지만 최근 2번의 등판에서는 연승을 거두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확률적으로만 보면 20패는 20승보다 더 희귀하다. 최후(1999년)의 20승 투수 넥센 정민태 투수코치는 “사실 20패가 문제가 아니라 15패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시즌 20패 이상은 장명부(2005년 작고)가 단 2번 기록했을 뿐이다. 하지만 장명부는 시즌 최다승(30승·83년)이라는 불멸의 이정표를 세운 투수이기도 하다. 때로는 실력(?)까지 동반돼야 하는 불명예 기록. 그래서 20패는 패러독스를 담고 있다.
○20패의 조건1 -리그 초창기의 완투형 투수
역대 시즌최다패 투수10걸(이하10걸·표 참조) 가운데는 2점대(1982년 노상수·1986년 이상군)와 3점대 방어율(1984년 장명부·2007년 윤석민)을 기록한 A급 투수들이 포함돼 있다. 2007년의 윤석민(KIA)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10승 이상을 챙겼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선수층이 얇았다. ‘선수보호’라는 개념도 흐릿해 에이스들에게 걸리는 부하가 컸다. 에이스가 아니더라도 전력으로 분류된 투수는 계속 출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부진하다 쳐도 대체자원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10걸 가운데 1982∼1986년의 기록이 7번이나 포함된 이유다.
당시에는 에이스들이 완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투수 분업화가 정착된 현재와는 달리 노디시전(No Decision·투수에게 승패가 기록되지 않는 경기)이 적었다. 중반 이후 박빙 상황에서 등판하더라도 에이스들은 경기를 끝까지 책임졌다. 따라서 꼭 승 또는 패를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승(511) 투수 사이 영이 20패 이상을 3시즌이나 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 대부분은 완투패였다. 영은 심지어 20승과 20패를 동시에 달성한 적(1891년·27승22패)도 있었다.
○20패의 조건2 -신생팀·약 팀의 주축투수
10걸 가운데 유일하게 2명의 투수를 배출한 1986년의 빙그레는 상황이 더 특수했다. 당시 빙그레는 창단 팀이라서 투수층이 얇았다. 한화 이상군(당시 12승17패) 운영팀장은 “이기든 지든 거의 완투였다. 장명부의 경우는 많은 돈(2년간 1억5000만원)을 들여 영입했기 때문에, 공이 좋지 않아도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메이저리그 전문가 송재우 해설위원은 “신생팀 투수들의 고전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1962년 창단한 뉴욕 메츠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4년 연속으로 20패 이상 투수들을 배출했다. 이 기간 동안 메츠는 내셔널리그 10개 팀 가운데 꼴찌였다. 특히, 로저 크레이그는 1962년(24패)과 1963년(22패) 2년 연속 20패 이상을 기록하며 불명예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10걸이 모두 약 팀 소속이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걸 중 해당년도 최하위 팀 소속 투수는 7명. 나머지 3번의 경우도 소속팀 순위는 ‘뒤에서 2번째’였다. 팀 타율이 하위권이어서 득점지원도 빈약했던 것도 10걸의 공통점이다. 특히, 2007년의 윤석민은 득점지원(9이닝)이 2.20에 그칠 정도로 불운했다.
○20패의 조건3 -20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현대 야구에서는 선수보호가 강조되고, 마운드 운영이 분업화 돼 노디시전이 많아졌다. 선발투수가 승리 뿐 아니라 패전을 기록할 기회도 줄어든 셈이다. 송재우 해설위원은 “현재적 개념의 투수분업화는 1980년대 후반 토니 라루사(당시 오클랜드) 감독으로부터 정착됐다”고 말한다. 162경기를 치르는 메이저리그에서도 1980년 브라이언 킹맨(20패·당시 오클랜드) 이후 20패 투수는 2003년 마이크 매로스(당시 디트로이트) 뿐이다.
현대야구에서는 대체카드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상황이라서 20패까지 1군에 계속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힘들다. 윤석민이 18패를 할 당시 KIA 사령탑이던 서정환 전 감독은 “지는 투수를 계속 내려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그 때는 윤석민이 타선과 불펜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유망주를 키우려는 의도도 있었고, 부상 투수가 많아 그를 계속 기용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채워진다고 해도, 투수 또는 감독의 정정당당함이 없다면 20패는 불가능하다. 2000년의 오마 달과 2001년 알비 로페스, 2003년 제레미 본더맨(이상19패) 등은 시즌 막판 선발로테이션에서 빠지면서 20패 위기에서 벗어났다. 감독들이 알아서 선수를 챙겼다. 2007년 윤석민을 두고도 ‘선수보호’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2003년 매로스가 20패에 다가갈 즈음, ‘20패 투수’ 킹맨은 경기장을 직접 찾아 매로스의 선전을 기원했다. 20패 투수라는 낙인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매로스는 ‘암 투병 중이던 조모의 사망’ 등 경기에서 빠질 이유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마운드에 올랐다. 그래서 20패를 하고도 “용감하고 정정당당한 투수”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트위터@setupma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