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명인’ 만들어주신 시어머니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혜자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기능보유자
시어머니(중요무형문화재 침선장 첫 기능보유자 정정완 선생·2007년 작고)가 가족들의 옷을 지으실 때마다 거들어 드렸던 것으로 나는 바느질과 함께한 삶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유학 가는 시동생에게 한복을 지어주시면서 외국인들에게 자랑하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난다. 어머니를 도와 조각보를 만들어 손님에게 낼 음식상에 덮어두고는 뿌듯해하기도 했다. 자랄 때는 침모가 있어 옷을 만들어본 적이 없지만 교회 갈 때마다, 설이며 크리스마스마다 어머니가 색동저고리를 입혀주셨던 기억 때문인지 바느질이 싫지 않았다.
어머니가 1988년 초대 침선장으로 지정되신 후 후학을 키우는 문제로 고심하셨다. “여보, 당신이 하면 어떨까”라면서 남편이 내게 권했지만 한참을 머뭇거렸다. 맏며느리로 신경 써야 할 집안일도 만만치 않은 데다 친정어머니도 아닌 시어머니한테 배운다고 생각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큰며느리는 다 좋은데 몸이 약해”라는 시어머니의 사랑과 염려의 말씀도 무능하다는 것처럼 느껴져 서운해지는 게 며느리의 마음이다. 남편이 극구 권해 마음을 먹고, 내가 몸이 약하니 남들이 1년에 할 수 있는 걸 나는 2년에 하자 생각하면서 어머니께 배워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바느질이 골치 아픈 일이다. 자식들에게는 이걸 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해라.” 기뻐하시는 건지 꺼리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집안일을 소홀히 할까 내심 걱정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여간해서는 장인인 어머님 눈에 들기 어려웠다. 어느 날에는 학생들 틈에서 만든 작품을 어머님께 드렸더니 “시궁창에 갖다버려라”라면서 던지셨다. 가위질 실수를 하고는 어머니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냥 뒤로 돌아 앉아버리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특히 이를 악물고 밤새 바느질 연습을 했다.
학생들이 오지 않는 휴일에 어머님을 찾아뵈면 내내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피곤한 어머니가 누워 계셨다. 그 어머니께 치마며 저고리 만드는 법, 혼례복과 수의 만드는 법 등을 여쭤봤고 어머님은 꼼꼼하게 가르쳐 주셨다. 어머님 말씀을 적은 메모를 모으니 책(‘구혜자의 침선노트’)이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맏딸이다. 조선의 3대 천재 중 하나로 꼽혔던 위당의 딸답게 비상하고도 대찬 분이셨다. 내게 전통복식사를 가르쳐주신 유희경 전 이화여대 교수는 지금도 종종 어머님에 대한 말씀을 해주신다.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도포를 지도해 달라고 생전의 어머님께 부탁드렸더니 한지로 축소형 도포를 만들어주셨는데 규격에 딱 맞더라는 등 뛰어난 장인으로서의 어머님 얘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머님 댁을 찾아 바느질을 배우던 어느 날, 어머님이 향교에서 도포 열 벌을 주문받으셨다면서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밤새워 만든 도포를 보고는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웬만큼 흉내는 냈구나.” 어머님만의 칭찬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 기뻤다.
구혜자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기능보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