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연안김씨 14대 종부… 한해 제사만 스무번 모셔요
자신들이 수리한 종택(宗宅) 정문 앞에 선 연흥부원군 14대 종손 김일주 씨(왼쪽)와 종부 김 캐런 씨 부부. 원주=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태권도가 맺어준 인연
현재 캐런 씨가 사는 곳은 강원 원주시 문막읍 지정면 안창1리. 연안 김씨 연흥부원군 김제남 선생(1562∼1613)의 종택(宗宅)이다. 그는 이 종가(宗家)의 14대 종부(宗婦)다.
젊은 시절의 캐런 씨.
두 사람을 이어준 건 태권도였다. 종가의 14대 종손(宗孫)인 김 씨는 10대 후반 태권도에 심취했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1964년 종손으로선 흔치 않게 미국행을 결심했다. 김 씨는 캐런 씨가 살던 곳 인근의 소도시 캔턴 YMCA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 캐런 씨 친구의 남편이 마을에 가라테 도장을 열면서 개장 파티에 김 씨를 초청했고, 캐런 씨에게 김 씨를 도장까지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게 됐다.
김 씨를 만난 이틀 뒤, 대학 1학년이던 캐런 씨는 친구들에게 “결혼하고 싶은 남성을 만났어. 그는 한국인이야”라고 깜짝 선언을 했다. 친구들의 반응은 “너 정말 미쳤어?”였지만 캐런 씨의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김 씨도 태권도를 배우던 제자들에게서 캐런 씨 집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러고는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도와 달라”는 핑계로 전화를 했다. 그렇게 연애가 시작됐다. 캐런 씨는 18세, 김 씨는 26세였다.
1970년 7월 4일 두 사람은 마을 교회당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종손이 미국 여성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김 씨의 모친은 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캐런 씨의 어머니는 한국인 사위가 탐탁지는 않았지만 가족이 된 그를 받아들였다. 김 씨는 태권도장을 열어 푸른 눈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1975년 9월 캐런 씨는 자신의 시어머니와 처음 대면했다. 시어머니가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 가족을 보기 위해 온 것이다. 김 씨의 여동생도 미국에 거주할 때였다. 캐런 씨는 당시 셋째 딸을 출산한 직후였고 시누이도 둘째를 낳은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거실 의자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앞에 앉은 며느리는 너무 긴장해 양손을 어깨에 댔다, 허벅지에 댔다, 어쩔 줄을 몰랐다.
저녁에 남편의 친구들까지 몰려왔다. 저녁상을 지어야 하는데 시누이는 너무 피곤하다며 나가떨어졌다. 조카 둘과 자신의 아이 셋을 보면서 시어머니에게 대접할 한국 음식을 만드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하지만 캐런 씨는 속으로 ‘할 수 있어’를 되뇌며 정성을 들였다.
“시어머니께서 당신 아들이 혹시 굶진 않을까, 한국 음식은 제대로 먹으면서 사는 걸까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당신 아들을 잘 돌보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지요. 하루 종일 그 생각뿐이었죠. 시어머니가 흐뭇해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한마디도 안 하셨으니까요.”
○ 제사음식 손수 마련
종손 노릇하기도 쉽지 않지만 종부 노릇하기는 훨씬 더 힘들다고들 한다. 1년에 모시는 제사만 수십 차례고, 찾아오는 종중(宗中) 손님도 맞아야 한다. 한국에 온 뒤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영어를 가르치는 등 사회활동을 몇 년 했지만 캐런 씨의 종부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목대비의 부친으로, 정쟁에 휘말려 세상을 떴지만 이후 복권돼 나라로부터 불천지위(不遷之位·제사를 영원히 모시는 신위)를 받은 이 종가의 현조(顯祖·이름이 높이 드러난 조상) 김제남을 비롯한 기제사가 연 13회에 시제(時祭) 등을 합치면 한 해 20여 회의 제사를 지낸다. 제사 때마다 이웃에 사는 종중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제사 준비를 지휘하는 것은 모두 캐런 씨 몫이다. 그는 제수(祭需)를 마련하고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손수 만든다. 하지만 종중 어른들은 아직도 이 사실을 잘 모른다.
푸른 눈의 외국인 여성을 종부로 맞아들이는 것은 종중 사람들에게도 낯선 경험이었다. 의혹과 불안의 눈으로 쳐다보는 이가 적지 않았고 갈등도 없지 않았다. 이들 부부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도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종가라는 개념조차 없는 문화에서 살아온 캐런 씨로선 이 모든 상황을 견디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남편을 사랑해요. 개인적으로 그와 결혼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종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생각할 때 그가 나와 결혼한 건 실수였다고 생각해요. 그는 한국인과 결혼했어야죠. 그가 나 때문에 훨씬 이전에 했어야 할 일을 다 못했다는 걸 알지요.”
종부만 아니라면 캐런 씨는 고향으로 돌아가 다른 은퇴한 부부처럼 여행도 다니며 소소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싶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과 남편의 처지에 상당히 의연하다. 그는 “남편이 여기서 가문을 돌봐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에 가지 못한다는 걸 이해한다”고 했다.
○ 나, 종부
1989년 세상을 떠난 캐런 씨의 시어머니는 마지막 2년을 미국에서 며느리의 돌봄 속에 보냈다.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시어머니를 벽안(碧眼)의 며느리는 목욕시키고, 머리 빗기고, 옷 갈아입혀 가며 봉양했다. 캐런 씨는 “시어머니를 아이처럼 돌봤다”고 했다. 근엄하기만 했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처음으로 웃어 보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시어머니는 일찍 남편(13대 종손)을 여의고 홀로 종가의 주인 노릇을 했다. 캐런 씨에게도 어쩌면 닥칠 일일 수 있다. 남편 김 씨는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캐런 씨는 어떤 선택을 할까.
“글쎄요, 제사들을 좀 통합해야 할 것 같아요. 많은 제사를 그렇게 자주 지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제사가 계속되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게 내 책임이니까요.”
듣고 있던 종손 김 씨가 “기자 양반이 듣고 싶은 대답이 이거 아니었소?”라고 말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캐런 씨가 덧붙였다. “내가 어디에 있든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제사는 집에서 딸들과 모시겠어요. 시어머니를 정말 존경하기 때문에 꼭 하고 싶어요.” 비록 우리말은 서툴지만 그는 영락없는 한국의 종부였다.
원주=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