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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사람들이 사는법]가족 독서모임 ‘네오클’

입력 | 2011-09-17 03:00:00

아이와 책읽고 토론하다보면 어른도 ‘푸른시절’로




네오클 회원들이 지난달 21일 ‘역사의 종말’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김범준 회원 제공

“역사가 자유와 평등으로 나간다는 방향성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체제로서 최종이라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봅니다.”

“저자의 논리를 비판해야지, 결론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쉰 줄에 들어선 경영 컨설턴트와 법대 졸업반 학생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입니다. 지난달 21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도서관 세미나실에서 벌어진 광경입니다. 이날 이곳에서는 고전읽기 모임인 ‘네오클’(네오·neo+클래식)의 102회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이곳에서 해오던 일입니다.

네오클은 특이합니다. 모임의 주체가 다름 아닌 가족들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다음 토론을 하는 것입니다. 이날 참여한 여섯 가족 중 자녀가 같이 나온 가족이 세 가족이었습니다. 자녀가 커갈수록 같이 시간을 보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요즘 아주 보기 드문 일입니다.

사실 이 모임의 시작도 부모가 어떻게 자녀를 키워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시작됐습니다. 모임의 산파역을 맡은 곽규홍 씨(52·서울고검 검사)는 “아이들한테 아무 말 말고 일단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부모로서 부끄러운 일은 아닌지 고민하게 된 게 계기였다”고 말합니다. 학과 공부하느라 바쁘겠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고전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부모와 진지하게 토론을 한다면 뭔가 얻을 게 있겠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2003년,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이런 뜻을 전했고 공감하는 가족들이 속속 참여해 지금의 모임이 이뤄졌습니다. 물론 몇몇 가족은 중도에 포기했고, 몇몇 가족은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독서, 독후감, 토론으로 이어지는 진행 방식이 부담스럽다’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8년이 지나자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잠깐. 네오클 이야기를 들으면 부모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아마도 ‘책 읽는 건 좋지만 자녀들이 공부할 시간을 너무 뺏기지 않을까?’일 겁니다.

2004년부터 참여한 정구용 씨(53·의사)는 “공부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는 전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해서 대학수학능력시험 전날 말고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곽민석 씨(23)도 “한 달에 책 한 권 읽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 이상, (성적이) 모임 시간에 좌우되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책을 많이 읽으니 논술시험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산만하던 아이가 의젓해졌다”거나 “중구난방이던 독후감 실력이 어느 날 일취월장하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서로를 ‘위원’이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쓰는 토론을 하고, 간혹 토론회의 사회도 보면서 아이들은 부모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비록 ‘역사본체론’이나 ‘역사의 종말’ 같은 책은 초등학생이 읽고 토론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감이 있긴 해도 말입니다.

‘이 나이에 무슨 독서모임이냐’며 주저하던 부인들도 토론에 계속 나오면서 적극적으로 변해간다고 합니다. 정 씨의 아내 이원옥 씨는 “솔직히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시작했는데 정작 엄마만 재미를 느끼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흠뻑 빠졌습니다. 이 씨는 책의 문제의식이나 내용이 가정주부의 일과도 무관하지만은 않다고 말합니다. 가정주부들이 그저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일 뿐,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자신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 선정은 운영위원 3인이 연말에 그 다음 해 전체 목록을 정합니다. 토론은 보통 3시간 동안 이어집니다. 차분하게 말하던 참석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격렬해집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를 화두로 해 시작된 이 모임의 가장 큰 수혜자는 오히려 부모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토론하는 동안만큼은 더 이상 세파에 찌든 직장인이나 힘든 가사로 고민하는 가정주부가 아니라 30년 전의 파릇파릇한 대학생으로 되돌아간 듯한 얼굴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임머신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