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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Wisdom]구한말 조선을 바라본 ‘긍정의 눈’

입력 | 2011-09-17 03:00:00

폴란드 민속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 일본에 먹혀가는 조선, 폴란드와 닮았구나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던 세로셰프스키는 양반 같은 특권층이 조선의 큰 병폐라고 봤다. 110년 전 갓을 쓰고 활시위를 당기는 양반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 1903년 조선을 찾은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 민속학자. 그만큼 전근대적 조선을 한탄하고 일본의 근대성을 예찬한 서구인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에 얼마나 매료됐던지 그는 자신의 책 ‘조선’(1905년, ‘코레야 1903년의 가을’·개마고원·2006년) 첫 페이지부터 이렇게 말한다.

“왜소한 일본인은 유능한 민족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동양 여기저기에 자기식의 생활방식을 주입하고, 중국인과 조선인은 일본인을 형제로 보기에 그들에게 기꺼이 복종한다. 우둔하고 무례한 조선 상인들은 아직까지 남의 도움 없이는 일을 처리하지도 못한다.”

○ 통역관과의 우정

젊은 시절 그는 사회주의 운동 세력에 가담했다 체포돼 시베리아에서 12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사회특권층에 대해 반감이 유독 컸던 그는 조선의 만성적 병폐가 500여 년간 고착된 신분·관료제 때문이라고 봤다. ‘납세와 군역이 면제된 특권층인 양반과 관료는 아무리 가난해도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지 않고 관직만 고수했다. 이들은 혈연과 한탕주의로 밀착됐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개혁도 휴지 조각처럼 날려버렸다. 과거 일본에 예술과 과학을 전수했던 조선이 창조와 진취적 정신의 불모지로 변한 것도 관료제 탓이다’라는 식의 생각이었다. 1세기 이전에 이미 귀족계급에 맞서 싸웠던 유럽인의 관점에서 조선 사회의 특권층은 가장 전근대적이면서 시대착오적이었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던 세로셰프스키는 여행 초기, 온통 부정적인 눈으로만 조선을 보았다. 그러나 조선인 통역관 신문균을 만나고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문균은 이른바 외국물을 먹은 궁중 관료였다. 진보적인 기질이 세로셰프스키와 잘 맞았다. 세로셰프스키는 종종 “지적인” 혹은 “내가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로 신문균을 부르며 존중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균이 조선의 관료들을 비난했다.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학교를 열어 교육도 하고, 학생들 유학도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는 건 관료들이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관료들이 (백성에게서) 도둑질하는 것은… 국고에 돈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외국인들은 우리를 등쳐먹을 생각밖에는 하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말과 숲을 차지하고서 의무는 다하지 않아요. 외국인들은 우리가 뇌물을 먹는다고 욕하지만 누가 우리를 망치는 겁니까. 누가 뇌물을 먹이는 겁니까. 대체 누가 돈으로 꼬드겨 우리가 조국을 배신하도록 만드는 겁니까. 당신네 외국인들이지요. 그렇게 해서 조선은 파멸해가고 있는 겁니다.”

○ 조선에서 자기정체성을 고민하다

세로셰프스키는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그럼 일본인은 어떻습니까?” 이 질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흔들리지 않는 일본 예찬자였기 때문이다. 신문균은 대답했다.

“그놈들은 최악입니다. 산 채로 우리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습니다. 그놈들은 은행 대출로 우리를 빚쟁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곧 그들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서울 땅의 삼분의 일이 벌써 그들 소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다들 그들에게 저당을 잡히고 또 잡히고 있습니다.”

세로셰프스키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돕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 때문에 일본을 비난하는 말에는 아주 예민해져서 “일본인들이 무슨 짓을 했지요?” “왜 특히 일본인들을 싫어하는 겁니까?”라고 재차 묻곤 했다. 그런데 신문균은 세로셰프스키가 맹신하던 일본에 대해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는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일본이 신분제를 폐지하고 국가경제를 정비하는 등, 조선에 유용한 개혁을 해주지 않습니까?”

신문균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만 우리를 만족시키려 하고 있어요. 우리의 모습을 바꾸고, 우리의 내면을 다 파내 버려 껍질만 남기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혼을 없애려고 합니다.”

세로셰프스키는 일본을 침략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러시아의 식민지 폴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여러 번 러시아를 침략자라고 비난했으면서도 조선에 와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균의 말을 들으며 다시 생각했다. 조선은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일본에 의존해야 하고, 의존하자니 나라의 주권이 위태로워지는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신문균은 ‘문명과 독립 사이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을 대변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긴 유배생활로 고독하고 황량한 인생을 살았던 그가 남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신문균과 헤어질 때 악수하며 힘주어 쥔 서로의 손을 통해 우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세로셰프스키는 조선의 지식인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자신도 모국의 근대성과 독립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 동일한 운명에 놓여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도 신문균처럼 식민지인이었다. 조선에 와서야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박수영 작가·건국대 겸임교수 teenpark@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