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셀러 시대 연 순정의 발라드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작곡가 이영훈과 작업한 첫 앨범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내기 전까지 이문세는 가수보다는 라디오 DJ로 더 알려졌다. 동아일보DB
하지만 한 신예 작곡가와의 운명적 조우가 노래를 향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던 이 청년의 삶을 바꾼다. 1930년대 남인수 박시춘으로 묶인 짝 이래 남성 이인삼각 경주로서 최고의 편성인 이문세 이영훈 콤비는 1985년 공식적으로는 세 번째, 사실상 네 번째인 앨범의 머리곡 ‘난 아직 모르잖아요’로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주도권을 확보해 가고 있던 하이틴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낸다. 그 지지의 이름은 바로 ‘밀리언셀러’였다.
이어 그의 최대 성공작인 네 번째 앨범은 20년이 넘도록 러브 발라드의 고전으로 읊어지는 ‘사랑이 지나가면’과 미디엄 템포의 클라이맥스를 지닌 ‘그녀의 웃음소리뿐’이 수미쌍관을 이루며 주류 언어로서의 발라드를 이 땅에 정립한다. 이 앨범 전곡의 작사, 작곡을 담당한 이영훈은 편곡을 맡은 김명곤(1970년대 말의 혜성과도 같은 밴드 ‘사랑과 평화’의 키보드 주자)의 도움으로 서구 대중음악의 세례를 받은 어린 수용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핵심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성공은 ‘시를 위한 시’를 간판으로 하고 ‘광화문 연가’로 강한 인상을 남긴 다섯 번째 앨범에서도 경이적이었고, 연속한 이 석 장의 밀리언 앨범은 1988년 발라드의 주류화에 쐐기를 박는 변진섭의 첫 두 앨범에 음악사적 전제가 된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을 석권했던 발라드가 이후 춤과 패션, 그리고 숨 돌릴 틈 없이 잘게 나뉜 화면의 편집 등 시각적 요소로 무장한 댄스뮤직 앞에 속절없이 자신의 권좌를 내주고 발라드의 젊은 영웅들은 추풍낙엽처럼 사라져 갈 때 (그 유일한 예외는 신승훈이다) 이문세와 그의 파트너는 1990년대를 막 넘어선 1991년에 의심할 바 없는 이들의 최대 걸작이자 나이 먹어가는 자신의 세대에 걸맞은 성인 취향의 일곱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 이전과 같은 소녀들의 환호성은 없었다. 그러나 세션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유영선과 연석원이 합류해 이루어낸 이 앨범의 A면엔 너무나 소중한 아름다움이 켜켜이 흐르고 있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현악 합주와 피아노, 그리고 알맞게 배치된 관악기의 후원을 받으며 전개되는 첫째 면의 머리곡 ‘가을이 가도’와 ‘사랑이라는 게 지겨울 때가 있지…’ 하며 허허롭게 20대의 열정의 비망록을 넘겨 버리는 다음 면의 머리곡 ‘옛사랑’은 다양한 스타일의 울림을 지닌 이 앨범의 백미다.
이 7집부터 2002년 14집 ‘빨간 내복’에 이르기까지 이문세는 성숙하고도 재기발랄한 ‘이문세적인 것’을 앨범에서나 ‘독창회’라는 타이틀로 명품 브랜드가 된 무대 모두에서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를 데 없이 섬세하거나 흔들림 없는 견고한 것이 아닌, 아직 가득 채워지지 않은 넉넉함과 세련됨이 묘하게 만난, 그러나 신비로움을 품은 친근함과 소박함이라는 한국 대중음악의 또 하나의 미학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