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아빠, 40대 月189시간 근무… 집은 여관? 생과부 엄마, 집안일도… 육아도… 나홀로 해요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 “아빠를 돌려주세요.”
초등학교 5학년 된 아들을 두고 있는 주부 이모 씨(41)는 요즘 우울하다. 남편이 얼마 전 승진하면서 업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일찍 퇴근해 가족과 시간을 보내던 남편이었다.
하지만 요즘 남편에게 집은 ‘여관’일 뿐이다. 피로에 찌들어 침대로 쓰러지는 남편을 타박할 수도 없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들은 엄마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매일 아이와 싸우는 게 지겹다. 아니, 가족이 지겹다.
대기업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두 딸의 아빠 정모 씨(47)는 이 시대 중년 아빠의 ‘자화상’이다. 회사에서는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집에서는 실패한 아빠가 돼 버렸다.
정 씨에게 요즘 가장 큰 고민은 고등학생 딸들과의 서먹한 거리감이다. 돌이켜보니 지난 3년간 1시간 이상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거의 없다. 자녀 교육에 무심한 아빠가 돼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학교수업은 잘 따라가는지, 새로 온 수학 과외 선생님은 괜찮은지를 물었다. 딸들은 눈을 피하며 “그냥 그래요” “잘 모르겠어요”라며 방문을 닫았다. 가장이면서 가장 대우를 못 받는 아빠들. 정 씨는 요즘 아이들 보기가 민망해 퇴근을 미룬단다.
고용노동부가 지난달 공개한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를 보면 지난해 40∼49세 남성의 월 근로시간은 총 189.2시간으로 전체 근로자 평균(총 187.0시간)보다 많다. 40대 남성 정규직 근로자의 경우는 무려 196.7시간이다. 초과근로시간 또한 40대는 월 11.5∼15시간으로 10시간 정도인 20, 30대보다 많았다.
게다가 툭하면 야근에, 술자리 회식이 이어진다. 개인의 자유보다는 조직 문화를 더 강조한다. 기운 팔팔한 20대 총각시절이라면 모를까, 토끼 같은 아이들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아빠들이다. 이들에게 ‘정시퇴근’은 발설해선 안 될 금기어가 된 지 오래다.
○ 고소득 전문직 아빠도 “가정은 없다”
결혼 3년차인 회사원 설모 씨(30)는 이달 6일 첫 아이를 출산했다. 기쁨은 잠시, 임신 사실을 알고 난 후 모든 출산준비를 혼자 해야 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산부인과는 늘 혼자 다녔다. 남편과 동행한 다른 임신부들이 부러웠다. 민망한 마음에 부러 시선을 외면하기도 했다. 이제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아빠가 된 남편은 지나온 10개월이 그랬듯 앞으로도 가정에 신경을 못 쓸 테니까….
설 씨의 남편은 입사 8년차인 방송국 예능프로그램 PD다. 일주일에 이틀은 방송국에서 밤을 새우고, 평소에는 오전 3, 4시에 퇴근해 오전 9시에 출근한다. 일요일에는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며 하루 종일 침대에 틀어박혀 있다. 이러니 제대로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아이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아이의 혀 아랫바닥과 입의 점막을 연결한 힘줄이 짧아 따로 시술을 받아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청천벽력. 일터에 있는 남편에게는 사실을 통보하기만 하고 수술을 혼자 결정했다.
“아이가 아프거나 하는 응급상황이 닥쳤을 때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이가 크면 이런 아빠를 이해할까요? 걱정이 큽니다.”
“컴퓨터 게임 좀 그만해라, 이러면 콧방귀도 안 뀌어요. 덩치 큰 아들 녀석이 가끔 대들 때는 겁도 나요. 그럴 때 애 아빠가 집에 없는 게 가장 아쉽죠. ‘생과부’가 따로 없어요.”
성미애 한국방송통신대 가정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의 아빠들은 가정 문제에 참여하고 싶어도 업무 몰입도가 지나치게 높아 불가능하다”며 가장들이 일터에 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했다. 성 교수는 또 “아버지의 의식도 변해야 한다”며 “일찍 퇴근할 때 생기는 여유시간을 자유시간이라 착각하지 말고 가족을 위해 보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아빠가 집에 있어야 육아 공동부담”
아빠가 가정에 돌아오면 저출산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기 때문에 엄마의 부담이 줄어들고, 그 결과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2008년부터 가족친화 인증제를 실시하고 있다. 2010년 현재 기업과 관공서 65곳이 참여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매주 수요일을 ‘가족 사랑의 날’, 보건복지부는 ‘가정의 날’로 정해 오후 6시가 되면 퇴근을 독려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런 일회성 행사들이 성과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일주일에 하루 반짝 일찍 귀가해 육아와 가사를 분담한다 해서 아빠가 제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재택근무나 시간제근무와 같은 탄력근무에 대한 요구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엄마들은 꽤 많다. 국내 무역회사에 다니는 30대 엄마의 이야기다.
“남편이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데 재택근무를 해요. 자연스럽게 엄마 역할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 삶에도 여유가 생겼어요. 이를 외조라 해야 하나요?”
엄마가 행복한 사회 자문단인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국회의원)은 “아빠들도 아이 키우는 행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려면 아빠들의 육아휴직을 활성화해야 한다. 저출산 문제도 그래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남성들이여, 당당하게 육아휴직-재택근무 하라 ▼
한국P&G 오쿠야마 사장의 ‘일-가정의 조화’ 경영철학
오쿠야마 사장이 하이쿠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들이 태어난 2003년부터다. 주중에는 육아를 맡는 아내가 아들의 성장일기를 쓰고 주말은 오쿠야마 사장이 바통을 이어받아 하이쿠 형태로 기록한 공책이 벌써 20여 권에 달한다.
한국 사회라 해서 모든 기업이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회사일로 가족에 소홀한 가장의 모습이 당연시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P&G는 거꾸로 기업의 존속을 위해 일과 가정의 조화를 구성원들에게 ‘강요’한다.
오쿠야마 사장은 “P&G는 생활용품은 물론이고 화장품 식품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소비재 회사”라며 “다양한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읽는 것은 바로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만큼 회사는 구성원들의 가정을 중시해야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한국P&G는 일과 가정의 조화를 가장 큰 원칙으로 여긴다. 누구나 일주일에 한 번씩 재택근무를 할 수 있고 최장 1년간 육아휴직을 보장받는다. 본인의 사정에 따라 출퇴근시간을 조정하는 탄력근무제도 가능하다. 오쿠아먀 사장은 “일본에서도 요즘 육아휴직을 하는 남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며 “이에 반해 한국 사회는 가정보다 회사에 더 헌신적인 남성상을 원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
▽팀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팀원 정효진(산업부) 구가인(경제부) 신나리(국제부) 이새샘(사회부)
우경임 한우신 남윤서 최예나(교육복지부) 곽민영(문화부)
:: 엄마가 행복한 사회 자문단 ::
강지원 변호사
김미경 더블유 인사이츠 대표
김행미 KB국민은행 강동지역 본부장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
이복실 여성가족부 청소년가족정책실장
임오경 서울시청 핸드볼 감독
전재희 국회의원·전 보건복지부 장관
전주원 전 여자농구 국가대표
정이현 소설가
조복희 육아정책연구소장
최성남 글로벌어린이재단 뉴욕 회장
한경희 한경희생활과학 대표
한영실 숙명여대 총장
:: 이런 엄마를 찾습니다 ::
육아와 교육, 경제적 문제 등으로 출산을 꺼리는 엄마, 그래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기쁨이 더 크다는 엄마…. 여러분의 사연이 담긴 제보를 받습니다. 시리즈에 대한 의견도 환영합니다. happymom@donga.com으로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