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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내인생을 바꾼 사람들]안성기란 배가 뜨기까지… 이장호는 ‘돛’ 이요, 배창호는 ‘키’ 였다

입력 | 2011-10-01 03:00:00


안성기 씨는 외부 환경에 따라 사람이 변하는 걸 싫어한다. 기쁨과 슬픔의 진폭도 크지 않다. 남들 보기에는 굴곡 없는 삶을 지켜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서울시청 뒤에 있던 성궁다방이었다. 광화문 일대에서 근무하는 대학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 만나던 곳.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어, 너 여기 웬일이냐”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장호 감독(66)이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 영화 편집실에서 우연히 만난 이 감독과 처음 인사하고 몇 달이 지났을 때였다. 대마초 연예인 활동 규제가 공식적으로 풀린 지 얼마 안 된 이 감독은 자신의 조감독인 배창호(58)와 함께였다. 배 감독과는 스쳐 지나듯 인사를 했다. 1979년 말 혹은 1980년 초, 안성기(59)는 자신을 배우로 다시 태어나게 한 두 사람과 만났다. 》
○ ‘나’라는 배를 띄워준 이장호

남베트남이 패망한 후, 베트남어를 전공한 안성기는 할 일이 없었다. 아역 이후 13년여 만에 다시 영화 네 편을 찍었다. “색다른 연기를 한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러던 터에 성궁다방 화장실 만남의 인연으로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 시나리오를 받았다. 단숨에 읽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너무 하고 싶었다. 사실 이 감독은 그에게 황석영 작가의 ‘객지’를 다음에 영화화할 건데 같이하자고 했다. 소설을 읽으며 준비하라고 하면서 한번 읽어나 보라고 던져 준 시나리오가 ‘바람불어 좋은 날’이었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중국집 배달부 덕배 역으로는 이 감독이 따로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었다. 원작인 최일남 소설 ‘우리들의 넝쿨’ 속 덕배가 사시(斜視)였기 때문에 정말 사시인 배우 한 명을 데려다 연기를 지도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당시 유명 개그맨이었던 고영수 씨를 캐스팅하려고 할 즈음이었다. 안성기가 덕배 역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감독은 그가 너무 도시적이고 지적으로 생겼다고 생각했다.

정말 하고 싶은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떼를 쓰거나 조르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가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리는 거죠. ‘되고 안 되고는 복이다’라고 할 수도 있고, 내 운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졸라서 될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에게는 제대를 하고 백수로 있으면서 영화계에 뛰어들 무렵 완성한 시나리오 4편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배우가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 감독에게 선을 보였다. “너도 시나리오를 쓰냐?” 놀라는 눈치였다. 훑어보더니 “야, 너 감각 참 좋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를 다시 보게 됐다는 표정이었다. ‘배우’ 안성기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후 만남이 잦아지고 술자리도 함께하다 보니 배우와 감독의 관계를 떠나 선후배같이 지내게 됐고 결국 덕배는 그의 차지가 됐다.

하지만 처음은 쉽지 않았다. 그가 나오는 첫 번째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배달을 마치고 철가방을 든 채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덕배. 엉덩이를 겨우 가릴 정도로 축 처진 바지, 뒷주머니에는 나무젓가락 서너 개를 꽂고 팔자걸음으로 언덕배기를 올라와야 했다. 이 감독은 코에 힘을 줘서 빵빵하게 한 다음 콧구멍을 벌름거리라고 주문했다.

완전히 바보 같았다. 북적거리며 구경하던 주위 사람들이 “저게 뭐야…” 하며 한마디씩 던지는데 그의 귀에 화살같이 꽂혔다. 부끄러웠고 당연히 몰입도 되지 않았다. 그 길을 몇 번이나 오갔을까. 그날 저녁 이 감독이 말했다. “그래서 너 배우 되겠냐.” 제대로 자극을 받았다. 이후로는 거침없었다. 열심히, 또 열심히 했다. 그렇게 만든 ‘바람불어 좋은 날’로 그는 배우로서 제대로 인정을 받았다. 이장호는 안성기라는 배의 돛이었다.

○ 내게 방향을 일러준 배창호

나중에 알았지만 안성기가 덕배를 연기할 수 있다고 이 감독에게 추천한 사람은 배창호였다. ‘할리우드 키드’였던 배 감독은 출중한 아역배우 시절의 극중 모습이 아니라 실물로 안성기를 처음 본 순간 변신의 폭이 무한한 ‘무채색’의 느낌을 받았다. 우수(憂愁)를 지닌 얼굴은 도시적일 수 있으면서도 소외된 계층을 표현할 수도 있다고 직감으로 알아챘다.

1980년 ‘바람불어 좋은 날’ 촬영 때 배우와 조감독으로 만나서 1985년 5월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배 감독과 거의 날마다 붙어 있었다. 영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천대받던 한국 영화의 위상을 어떻게 하면 높일 수 있을까 고민을 나눴다. 술도 많이 마셨다. 술을 좋아했던 이장호, 술을 엄청 마셨던 배창호가 다 취하고 나면 상황을 정리하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건 언제나 안성기의 몫이었다.

당연히 배 감독의 감독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년)의 주인공은 그였다. “굉장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완전히 서로 친구같이 되어 가지고. 구체적으로 기억은 나지 않는데 말이 필요 없이 같이하자고 그랬을 거예요.”

촬영장에서 그와 배 감독은 어느새 다음 작품을 이야기하곤 했다. 배 감독이 “안 형, 우리 다음에는 이런 거 합시다”라고 하면 그는 “어 좋은데, 그거 합시다”라고 받았다. 그러면 정말 귀신에 홀린 듯 얼마 안 있어 그 작품을 함께 찍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배 감독과 줄기차게 작품을 같이했다.

배 감독은 안성기라는 배우를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변형시켜 매번 새로운 개성의 인물로 만들어냈다. ‘고래사냥’의 거지왕초 민우에서 ‘깊고 푸른 밤’의 냉정하고 야망에 찬 호빈으로, ‘적도의 꽃’의 자폐적인 미스터 M에서 ‘우리 기쁜 젊은 날’의 순수한 청년 영민까지…. 그는 다양한 캐릭터를 원 없이 소화해낼 수 있었다.

“요즘 같으면 그렇게 배우들이 넘나들 수 있겠어요. ‘이건 무조건 송강호 몫이지’, ‘이건 이병헌이 딱이야’, 이런 식으로 자리매김이 돼 있잖아요. 그 당시에는 남자배우가 적은 데다 개성이 다양한 인물도 없었기 때문에 배 감독이 나를 전부 그런 인물로 만든 거예요.”

1980년대 안성기는 배 감독 영화 10편에서 모두 주연을 맡았다. 1992년 ‘안성기 영화주간’을 열었던 프랑스 아미앵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그가 주연한 영화 7편을 본 뒤 “전부 한 배우인 줄 몰랐다”며 탄복했다. 배 감독은 안성기라는 배의 키였다.

○ ‘5할 타자’ 안성기

“79전 40승 24무 15패…?”

안성기가 성인이 된 후 30년 남짓 출연한 작품은 모두 79편. 그중 자신이 열심히 찍었고 흥행과 작품성에서 평가를 받은 건 40편을 헤아린다. 촬영 도중 ‘이건 아예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든 작품은 한두 편에 불과하다. 40승 가운데 상당수는 1980년대 이 감독, 배 감독하고 한 결과다. 야구를 좋아하는 그는 “그때를 (3할이면 강타자 소리를 듣는) 타율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장타율로 한 8할쯤 될까”라면서 웃었다.

만약 그가 두 감독을 만나지 않았으면 영화를 하지 않았을까. “그 정도는 아니었겠죠. 그렇지만 두 감독이 다른 배우하고 했다면 그 배우들이 굉장히 성공했을 거예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다면 내 색깔이 지금과는 다르게 입혀지지 않았을까요. 두 사람을 만난 건 운명적인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당시 다른 감독이나 배우들이 두 감독하고만 영화를 하다시피 한 자신을 굉장히 미워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때는 당당했다. “두 감독하고 하는 시나리오보다 더 좋은 걸 가져오라”고 말하곤 했다.

아쉽긴 하다. 같이 나이가 들면서 그 나이에 맞는 영화 세계를 같이 보내고 싶었던 두 감독이 1980년대를 지나 주춤하는 모습이. 하지만 언젠가 두 감독과 재회할 날이 올 것임을 믿는다. 차분하게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게 안성기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