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구장’서 본 메시의 매직, 가슴 쿵쾅
리오넬 메시의 이날 세 번째 골이 그물을 갈랐다. 전후반 90분이 지나고 하나둘 자리를 뜨던 관중에게 ‘아직 경기 안 끝났거든’ 하며 시위하는 듯했다. 지난달 25일 0시(현지 시간), 스페인 카탈루냐의 FC 바르셀로나 홈 경기장 ‘캄프누’에서 메시가 뛰고 있었다. 바로 우리 눈앞에서.》
○ 호날두의 땅에 도착하다
9월 17일 오후 9시 마드리드공항에 내렸다. 렌터카를 이튿날 오전 공항 주차장에서 넘겨받기로 돼 있어 공항 대합실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여행객들이 대합실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해뜰 무렵 공항 직원들이 “누워 있지는 말라”고 하는 게 전부다. 마드리드공항이 노숙하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이유를 알 듯했다.
메시가 캄프누에서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FC 바르셀로나의 영원한 숙적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포기해야 했다. 전체 여행 일정에 맞추자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레알 마드리드 홈 경기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구경에 나섰다.
9월 20일 오전 10시, 베르나베우에 도착했다. 안내원이 붙지 않는 투어 표를 끊어 내부로 들어갔다. 어두운 계단을 한참 올라가 출입구로 새 나오는 햇빛을 따라가면 베르나베우의 피치(pitch·운동장)가 슬며시 초록빛 속살을 드러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이 터져 나왔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질주하는 곳이다.” 이 경기장은 1947년 개장했다. 현재 좌석은 8만5000석이 좀 넘지만 1957년에는 12만 명이 들어찬 적도 있다.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내부의 역사 박물관. 각종 트로피(위)와 역대 유니폼 등(아래). 현재 선수단 대형 사진(가운데) 앞에서 선수인 양 폼을 잡아 봤다.
다른 박물관과 달리 사진촬영도 자유롭다. 박물관 직원들은 사진 앞에서 머뭇거리는 관광객들에게 “쁘리(free·공짜)”라고 알려준다. 박물관을 나와 피치로 내려간다. 잔디를 밟을 수는 없지만 팀 벤치에는 앉을 수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조제 모리뉴 감독처럼 폼을 잡아봤다. 기분이 괜찮다.
○ 가자 바르셀로나로!
9월 21일 바르셀로나로 발길을 돌렸다. 목표는 24일 캄프누에서 펼쳐질 FC 바르셀로나의 홈경기.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까지 600km 남짓을 달렸다. 수도 마드리드와 스페인에 속하기를 마음속으로 거부하는 바르셀로나, 두 도시의 매끄럽지 못한 역사를 대변하듯 길은 험난했다. 고속도로는 곳곳이 공사 중이었고 대형 트럭들은 성난 듯 우리의 소형차를 추월해댔다.
스페인에서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카스티야 지방과 바르셀로나를 축으로 하는 카탈루냐의 지역감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아직도 심심찮게 분리 독립을 요구한다. 원래부터 존재했던 지역감정은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 장군이 카탈루냐를 억압하면서 심해졌다. 특히 축구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프랑코가 레알마드리드만 총애했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니 마침 메르세 축제 기간이라 각 나라 여행객이 거리에 가득하다. 거대 인형 퍼레이드, 인간탑 쌓기 등이 장관이었다. 중심가에서 약 15km 떨어진 바닷가 엘 마스누 야영장에 짐을 풀었다. 텐트를 치고 밥을 지어 먹으니 벌써 자정 무렵. 유럽 첫 캠핑을 기념하기 위해 술이나 한잔할까 했지만 둘 다 금세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바르셀로나 관광투어 버스를 탔다. 적(赤), 청(靑), 녹(綠) 세 개 노선이 있다. 하루 이용료가 23유로(약 3만6000원)나 되지만 관광명소를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기 때문에 항상 붐빈다. 뚜껑 없는 2층 버스여서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피부에 와 닿지만 강한 햇살 탓에 자외선방지 크림을 떡칠하듯 발라야 했다. 우리가 탄 버스가 캄프누를 지나쳐 간다. 당장 내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메시, 조금만 기다려.
경기 당일 오후 7시 캄프누에 도착했다. 2시간가량 시에스타(낮잠)를 즐기며 저녁을 느긋하게 먹는 이 나라에서는 축구 경기도 오후 10시에 시작한다. 경기장 주변은 벌써부터 사람들로 넘쳐났다. 선수들의 승용차가 출입하는 입구에는 메시의 얼굴을 잠시나마 보려는 관객으로 인산인해다. 경찰이 나서서 정리를 했다. 입장권은 한국에서 온라인 예매를 했다. 예매 사이트에는 결제에 쓰인 신용카드를 제시하면 입장권을 준다고 했지만 실제 창구에서는 여권을 확인했다.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좌석 위치에 따라 다르다. 선수 및 코치진의 벤치 뒤쪽, 지붕 덮인 좌석들은 FC 바르셀로나 경영진 등 VIP들의 차지다. 이들의 출입구는 고급 호텔 로비같이 번쩍번쩍하다. 우리 좌석으로 향하는 출입구는
34번 문. 문을 지나 계단을 5분 정도 걸어 오르면 도달하는 꼭대기 층이다. 손을 들면 하늘이 만져질 듯하고 피치는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지만 물경 12만 원짜리 좌석이다. 내려다보이는 캄프누는 빅뱅 직전의 우주처럼 아득하다.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 메시, 메시, 또 메시
이곳이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캄푸누다. 1957년 문을 열었고 수용 인원은 9만9354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축구장이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중이 들어가는 경기장은 평양 능라도 경기장(일명 5·1경기장, 15만 명 수용)이다. 조영래·우승호 씨 제공
경기가 시작됐다. 홈팀이 아틀레티코에 잠시 밀리는 듯하자 관중석 여기저기서 ‘감독님’들이 등장한다. 이어폰으로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던 앞좌석 남성은 수십 m 아래서 뛰는 선수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지시’를 해댔다. 이들 ‘감독’의 주문이 통했는지 이후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초반 골대를 맞힌 게 아틀레티코의 유일한 공격다운 공격이었다.
전반 25분이 지날 무렵 비가 온다. 스페인에 와서 처음 맞는 비다. FC 바르셀로나의 팬이라면 “비쯤이야” 하며 끄떡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웬걸. 방금 전까지 열을 내던 이어폰 낀 ‘감독님’을 필두로 많은 사람이 비를 피해 스탠드 밖 복도로 나갔다. 다시 캄프누에 오기 어려운 우리는 우산 하나에 의지해 자리를 지켰다.
비 때문에 관중석이 한바탕 소란스러울 즈음 메시가 팀의 세 번째 골을 넣었다. 측면에서 공을 받아 센터링할 듯 수비수들을 속이고 골문까지 몰고 가 가볍게 밀어 넣었다. ‘와’ 하는 환성이 터지자 비를 피해 복도를 서성이던 사람들도 재빨리 관중석으로 되돌아온다. 하프타임 때는 관중 모두가 복도로 밀려 나와 화장실이나 매점에 갈 엄두도 못 냈다.
후반전은 ‘메시와 친구들’의 한바탕 축구 쇼였다. FC 바르셀로나의 5-0 완승.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메시를 위한 응원은 따로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위아래로 흔들며 천천히 ‘메∼시∼’를 연호하는 것이다. 메시가 해트트릭을 이루자 관중 모두 기립박수를 보냈다. 표정에 즐거움과 경외감이 뒤섞여 있다.
경기가 끝나자 주차장 출구에는 자가용을 타고 나오는 선수들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비로 미끄러워진 오르막길을 어렵사리 올라오는 차들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FC 바르셀로나가 이기면 만사가 즐거워지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슴도 흥분과 여운으로 먹먹해졌다. 맥주가 필요한 밤이었다.
마드리드·바르셀로나=조영래·우승호 cyr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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