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강헌의 가인열전]김광석

입력 | 2011-10-03 03:00:00

‘이등병 편지’ 같은 강한 연민의 울림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가수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됐지만 ‘서른즈음에’ ‘사랑했지만’ 같은 그의 대표곡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동아일보DB

양희은의 당당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1970년대 자유주의 청년 세대의 상징이었다면 결핍과 슬픔을 승화하는 강력한 연민의 울림을 지닌 김광석의 목소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청년 세대들의 영원한 동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광석은 짧은 생애 동안 고작 네 장의 정규 앨범과 두 장의 ‘다시 부르기’ 앨범을 남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목소리가 밤하늘의 별처럼 아련하게 빛을 발하는 ‘서른 즈음에’나 ‘사랑했지만’ 같은 노래를 통해, 그리고 원곡보다 더 사랑받는 ‘이등병의 편지’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같은 노래들로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대구 출신으로 명지대 82학번인 김광석은 ‘광주’와 ‘6월 민주항쟁’이라는 무겁고도 뜨거운 시대정신의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학 초년생 때 그는 누군가 갖다 준 운동권 노래책에 실린 김민기의 ‘못생긴 얼굴’을 기타로 퉁기며 한 소절씩 불러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그 사소한 순간이 왜소한 청년 한 명의 운명을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지역 대학의 노래꾼들이 모인 연합메아리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김광석은 1984년 김민기가 기획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남자들’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이 음반에 실린 합창곡 ‘그루터기’가 그의 첫 번째 공식적인 녹음이 되었다.

1980년대에 수도 없이 펼쳐졌던 비합법 공연에서 그의 ‘녹두꽃’과 ‘이 산하에’에 매료된 진보 진영의 청중은 그가 김민기와 한돌, 정태춘으로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이어 내려온 ‘민중의 가객’이 되어 주기를 희망했으며 사랑타령과 탈인간적인 기계적 리듬의 범람에 휩쓸려 버린 비판정신의 담지자가 되어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김광석은 전투적인 예술가가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모던 포크의 가장 중요한 전제인 싱어송라이터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추지도 못했다. 그가 프로페셔널 뮤지션으로서 행보를 시작한 곳도 운동권이 아닌 산울림의 김창완이 프로듀스한 포크록 그룹 ‘동물원’이었고, 그의 대중적 명성을 결정지은 노래 역시 동물원의 데뷔 앨범 첫머리에 실린 ‘거리에서’(김창기 작곡)와 그의 솔로 2집을 견인했던 ‘사랑했지만’(한동준 작곡) 같은 풍부한 울림과 짙은 시정을 동반한 발라드였다.

그렇다고 한국 대중음악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있어 그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1990년대에 이르러 더는 소망스러운 공간이 되지 못하고 힘없이 퇴조해간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의 문화를 움켜쥐고 중흥의 자양분을 공급했던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그는 대규모 집회장의 무대 대신 200∼300석의 촘촘하고 내밀한 소극장에서 벌어지는 작은 아름다움의 소통을 자신의 음악적 의제로 설정했던 것이다.

1990년대 초 그는 김민기가 만든 학전 소극장의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인 1995년에 1000회 공연을 돌파했다. 현란한 이미지의 유령이 춤추던 시대에 김광석은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사멸해 가던 모던 포크의 불꽃을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중음악사적 과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두 앨범, 즉 ‘서른 즈음에’를 담고 있는 네 번째 정규 앨범과 두 번째 ‘다시 부르기’ 앨범은 통기타 음악의 정체성 확립을 향한 최선의 교두보였던 것이다.

‘일어나’로 문을 여는 네 번째 앨범은 정관과 회한이 실내악적인 정조로 아롱거리는 걸작이다. 그리고 조동익의 유려한 편곡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다시 부르기2’ 음반은 리메이크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랩 음악이 호령하는 1990년대의 한복판에서 한국 포크 음악의 위대함을 다음 세대에게 전한 명반이다. 이 앨범에서 김광석은 한대수와 김민기, 그리고 양병집과 김의철, 백창우와 김목경 같은 사라져 가는 이름들을 절절하게 호명하고 이들의 노래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가치들을 완벽하게 제련해 낸다.

이 정점의 두 앨범에서 김광석은 한국 통기타 음악의 가장 고귀한 목소리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백조의 노래가 되었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