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전까지만 해도 '작은 영화'로 분류됐던 영화 '도가니'가 커다란 흥행세를 보이고 있다. 22일 개봉한 '도가니'는 개봉 첫 주말 76만6892명을 동원, 가볍게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흥행세는 주말을 경과한 이후 오히려 더욱 거세져 29일 현재까지 무려 141만3685명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평일에도 12~13만 명대 관객이 몰리고 있는 셈이다. 개봉 후 정확히 일주일이 경과되는 30일엔 손익분기점인 150만 명대도 돌파할 기세다.
이에 미디어는 일제히 '이변'을 주장하고 나섰다. '의외의 복병'이었다는 평가도 등장했다. 이런 작은 영화, 사회파 영화가 대형 상업영화들을 제치고 1위, 그것도 어마어마한 스코어 차이의 1위를 기록했다는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더 넓게, 정치사회적 상황까지 고려한 분석을 통해서는 300만 명대 이상 흥행도 몇몇 인터넷 영화전문 블로거들 사이에서 점쳐진 바 있다. 어떻게 그런 예상이 가능했을까. 하나씩 살펴보자.
●'도가니' 흥행, 절대 의외가 아니었다
'도가니' 흥행에 대해 일반적인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공지영 원작소설의 인지도와 주연배우 공유의 스타 파워다. 물론 그런 요소들이 역할한 부분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절대요소였다고 보긴 힘들다.
일단 공지영 원작소설의 문제다. 분명 소설 '도가니'가 베스트셀러였던 건 맞다. 약 50만 부가 팔려나간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출판시장에선 그 정도면 대박이다.
비슷한 사례가 수년 전 '아내가 결혼했다' 등에서도 발생한 바 있다. 베스트셀러 원작이었고, 분명 소설이 판매된 수량보다는 많은 관객이 관람했지만, 결과적으론 실망스런 흥행을 거뒀다.
한편 공유 스타 파워 부분은, 공유의 군 제대 후 대대적 복귀작이었던 '김종욱 찾기'가 심심한 결과만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딱히 그럴싸하질 않다. 사실상 공유는 아직 영화장르에서 스타 파워를 언급할 단계는 아니다. 다소 무거운 소재를 이끌어나가는데 있어 공유의 존재가 대중선택의 거부감을 줄였다는 점 정도만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도가니' 흥행의 결정적 요소는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가장 먼저 언급할 만한 요소로는 뭐니 뭐니 해도 '시장이 비어있었다'는 점을 들 필요가 있다. 본래 추석을 낀 9월 흥행은 기본적으로 추석영화들의 관성흥행 구도다.
추석영화들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더 끌고 나가다 본격적 가을영화들로 대체된다. 그런데 올해 추석영화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약했다. 시대착오적 멜로드라마 '통증', 아예 시장착오적인 경주마 드라마 '챔프', 그리고 이미 개봉 전 조악한 완성도로 비판 받은 '가문의 수난: 가문의 영광 4'밖에 없었다.
뭔가 화젯거리가 될 만한 영화가 등장하면 바로 관객이 이동될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추석 시즌 관객 수가 예년에 비해 크게 감소했던 점으로 보아, 연속 영화 관람의 피로감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바로 터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 영화전문 블로거들도 추석영화 라인업이 결정되자마자 '도가니'의 흥행을 점친 바 있다.
● 한국선 본래 실화 소재 사회파 영화들이 잘 된다
다음으로, 한국영화시장에선 본래 '도가니' 같은 류의 사회파 영화들이 유난히 잘 된다는 점을 짚을 수 있다. 당장 한국영화 역대 흥행 10위권만 봐도 알 수 있다. 1위 '괴물', 2위 '왕의 남자', 3위 '태극기 휘날리며', 4위 '해운대', 5위 '실미도', 6위 '디워', 7위 '국가대표', 8위 '과속스캔들', 9위 '친구', 10위 '웰컴 투 동막골'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과속스캔들' 정도를 제외하자면, 기본적으로 모두 사회파적 경향을 지녔다는 점이다.
'괴물'은 반미감정을 토대로 서민층과 기득권층의 대결구도를 그렸다. 이런 대결구도는 '해운대'에서도 재연된다. '왕의 남자'는 개봉 당시 현실정치 풍자극으로 받아들여졌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웰컴 투 동막골' 같은 6.25전쟁 및 남북분단 소재 영화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국가대표' 역시 스포츠종목 선수들의 비애와 세계무대에서의 핍박을 담았다. '디워'는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 사회적 코드로서 작용했다.
이 같은 구도 내에서 특히 '도가니' 같은 실화 소재 사회파 영화들이 잘 되고, 해당 사건이 대중의 공분을 자아내는 것이라면 가히 '흥행보증수표'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흥행 확률이 높아진다.
'살인의 추억' '그놈 목소리' '아이들...' '화려한 휴가' 등 예는 많다. 실화 소재를 떠난 사회파 영화라면, 기득권층과 서민층의 대립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인기가 좋다. 경제 불황기 대중의 마이너리티 정서를 자극해주기 때문이다. 앞선 '괴물' '해운대' '국가대표' 등 외에도 '공공의 적' '1번가의 기적' '너는 내 운명' 등이 그랬다.
'도가니'는 이런 '의외의 흥행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실화 소재였고, 사회 기득권층이 사회적 약자들인 장애아동들을 유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거기다 이 같은 상황을 둘러싸고 더 큰 사회 기득권세력이 구제해주지 않는 현실이 드러난다. 대중의 공분은 가히 최대치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구도다. 흥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 지금은 '선거' 기간이다
끝으로 '도가니' 흥행의 진정한 '핵심'을 생각해보자. 먼저 한국영화산업에서 공공연히 말해지는 대박영화 미디어관계 공식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충 이런 식이다. 포털사이트 평점이 높으면 200만, 종합일간지 정치·사회면에서 다뤄지면 300만, 지상파TV 9시뉴스에서 다뤄지면 500만, 지상파TV 심야토론이나 특집 다큐멘터리 등에서 다뤄지면 700만 이상.
일리가 있는 공식이다. 먼저 포털사이트 영화평점에 가담하는 헤비-오디언스, 즉 영화를 자주 관람하는 주 소비층 내 반향만으로는 200만 관객보장이 한계다. 그보다 더 나가려면 평소 영화를 잘 안 보는 계층을 끌어들여야 한다.
영화 관련 미디어를 들여다보지 않는 일반 대중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종합일간지 정치·사회면과 지상파TV 9시뉴스 노출 등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다 지상파TV 심야토론 등에서 다뤄질 정도면, 이미 종합일간지 정치·사회면과 지상파TV 9시뉴스 노출 등의 '관문'을 모두 통과해 사회적 의제로까지 성장했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미디어 노출의 최정점에 가깝다. 그래야 700만의 벽이 깨진다는 논리다.
그런데 '도가니'는 바로 이 지점에서 큰 어드밴티지를 얻었다. 이미 포털사이트 평점 정도는 뚫었고, 지상파TV 9시뉴스는 물론 종합일간지들도 대서특필하고 있다.
경향신문 9월29일자는 정치·사회면 게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문 1~3면을 통째로 '도가니'에 할애하고 있다. 지금 기세대로라면 지상파TV 심야토론 주제 선정도 쉽게 이어질 전망이다.
어떻게 '도가니'는 이 같은 종합미디어의 전폭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그와 유사한 여타 사회사건을 다룬 영화들도 이 정도 '밀어주기'까진 가지 못했는데 말이다.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지금은 '선거'를 앞두고 있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10.26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가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다. 모든 종류의 정치사회적 반향이 표심으로 직결될 수 있는 시기다.
그러니 정치에 무게를 두고 있는 수많은 종합일간지 및 방송뉴스 등에서도 '도가니'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데올로기진영에 속해있는 미디어일수록 '도가니'는 놓쳐선 안 될 '건수'였다.
실제로 이데올로기진영 미디어들은 '도가니'를 놓고 사회 기득권층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폭발한 경우라며 표심과 연결될 수 있을 법한 논조들을 수없이 쏟아내고 있다.
이러니 '도가니'가 미디어 관심을 받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고, 그런 관심을 받았는데도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 대중문화상품발(發) 사회적 의제의 한계
현재 흥행세만으로도 '도가니'는 이미 500만 명대 흥행은 맡아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700만 돌파, 시장상황이 잘 받쳐준다면 또 다른 1000만 영화 탄생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이 같은 흥행호조와 더불어 '도가니' 소재가 된 광주인화학교에 대해 재수사도 착수된 상황이다. 경찰은 경찰청 본청 지능범죄수사대 5명과 광주지방경찰청 성폭력 전문수사관 10명으로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관련 의혹을 점검하기 위한 확인 작업에 착수했다.
이에 더해 정치권에서도 '도가니' 같은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성폭력 친고죄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실 이 정도로 사회적 순기능이 많은 영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순기능들을 마냥 기대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긴 하다. 본래 대중문화상품에 딸려 들어온 사회적 의제는 그 설정 지속성에 있어 뚜렷한 한계가 있다. 대중문화상품 유통 속성에 종속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영화흥행과 함께 잠깐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극장공개가 마무리 지어지면 곧바로 의제가치도 폭락했다. 대중문화상품의 체인식 교체소비 논리처럼, 상품이 쏟아낸 사회적 의제도 체인식으로 교체소비 됐다.
'도가니'가 어렵게 얻어낸 의제가 이전처럼 '반짝 의제' 정도로 전락해버리지 않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절묘한 상업적 계산과 기적 같은 타이밍으로 얻어낸 사회적 의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되풀이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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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