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노지설 방송작가
드라마 ‘여인의 향기’는 이 두 문장으로 출발했다. 처음엔 나쁜 검사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개과천선하는 이야기, ‘88만 원 세대’가 불치병에 걸려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등을 놓고 고민했다. 주인공이 나쁜 검사라면, 88만 원 세대라면 죽기 전에 뭘 하고 싶을까 고민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감독님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라면 죽기 전에 그동안 내기만 했지 받지 못한 결혼 축의금을 꼭 받으러 다니겠다”라는 얘기를 농담처럼 던졌다. 그 자리에서 주인공은 노처녀로 결정됐다.
시한부라는 소재의 특성상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즉 버킷리스트였다. 그게 곧 드라마의 줄거리인 셈이니까. 주인공인 연재(김선아 분)의 버킷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 방송사 홈페이지를 통해 설문조사를 하기도 했고, 보조 작가와 머리를 맞댄 채 수백 개의 버킷리스트를 뽑았다. 드라마 소재를 잡은 2월부터 버킷리스트가 등장하는 4회 대본이 나오던 6월 말까지 줄곧 버킷리스트에 대해 논의했고, 이를 거쳐 버킷리스트 수를 차츰 줄여나갔다.
1. 하루에 한 번씩 엄마를 웃게 만들기 2. 나를 괴롭혔던 놈들에게 복수하기 3.탱고 배우기 4. 갖고 싶고, 먹고 싶고, 입고 싶은 것 참지 않기 5. 웨딩드레스 입어 보기 6. 톱스타 준수랑 데이트하기 7. 자전거로 해안도로 달리기 8. 하루 동안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 보기 9. 첫사랑 찾기 10.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듀엣 곡 불러보기 11. 세상 모든 여자가 부러워할 만한 프러포즈 받아 보기 12. 틈틈이 봉사하기 13. 엄마 재혼시키기 14. S에게 용서 구하기 15. 누군가의 의미 있는 은인 되기 16. 내 인생의 흔적 남기기 17. 날 아는 사람들에게 멋진 여자로 기억되기 18.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눈 맞으며 키스하기 19.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20. 사랑하는 사람 품에서 눈 감기.
극중 연재가 수첩에 써내려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스무 가지’다. 특별할 것은 없다. 불가능한 일도 없다. 하지만 이 일들을 주인공인 연재는 하지 않았다. 죽음을 선고받기 전까지는.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실천하지 않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는 건 내 오랜 꿈이다. 한때는 돈이 없어 엄두를 못 냈고, 한때는 시간이 없어 엄두를 못 냈다. 지금은? 체력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드라마 ‘여인의 향기’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자의 절절한 ‘사랑’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아주 먼 미래의 행복이 아닌 지금, 바로 오늘, 이 순간의 행복 말이다. 나중에, 나중에 하면서 미뤄뒀다간 영원히 못하게 될 그 일을 지금 하자. 그래야 행복해진다. 그런 주제를 매일 생각하며 8개월을 보냈으니 이젠 나도 좀 달라질 때가 되긴 됐다.
얼마 전에 제주 올레길 19코스가 개장했다고 한다. 이번 달 안으로 그동안 완주 못했던 올레길에 다시 한번 도전해볼 생각이다. 드라마를 쓰는 동안 체력이 뚝 떨어졌다. 더 늦기 전에 이 저질 체력으로라도 걸어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할 날도 오겠지.
노지설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