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만에 존폐위기

황창규 기획단장
기획단은 국가의 ‘미래 먹을거리’ 사업으로 6개 미래산업 선도기술개발사업을 선정한 뒤 내년 예산으로 1561억 원을 신청했지만 예산 관련 부처를 거치면서 94.2%가 삭감된 90억 원만 배정받았다.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김태호 의원이 5일 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기획단은 △디스플레이(투명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해양플랜트(심해자원 생산용 해양플랜트) △인쇄전자(인쇄전자용 초정밀 연속생산 시스템) △그래핀(다기능성 그래핀 소재 및 부품) △SMR(다목적 소형 모듈 원자로) △뉴로 툴(뇌-신경 IT 융합 뉴로 툴) 등 6개 사업을 미래산업 선도기술개발사업으로 추진했지만 그래핀, SMR, 뉴로 툴 등 3개 사업은 예산을 한 푼도 배정받지 못했다. 디스플레이, 해양플랜트, 인쇄전자 사업에 대해서도 각 294억, 308억, 210억 원을 내년도 예산으로 요청했지만 예비타당성 조사와 지식경제부, 기획재정부를 거치면서 각각 30억 원으로 일괄 삭감됐다.
기획단은 2012∼2018년 6개 사업에 대해 1조5000억 원(정부 7500억 원+민간 7500억 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했지만 평가원은 디스플레이, 해양플랜트, 인쇄전자 등 3개 사업에 정부 예산 2045억 원을 포함해 총 5860억 원만 투입하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기획단 관계자는 “평가기관이 장기적인 안목이 아닌 현재 관점에서 성과만을 따진 것은 아닌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6개 국가전략사업 중 3개 예산 전액 깎여 ▼
○ 2025년 380조 원 매출 기대했지만…
기획단은 예산 배정에 대해 크게 낙담하고 있다. 황 단장은 4일 지식경제위원회 국감에서 “반도체에 이은 (차세대) 국가 대형 먹을거리 예산이 굉장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획단 관계자는 “63빌딩을 짓겠다는데 정부는 연립주택을 지을 돈만 준 셈”이라며 “이 돈으로는 사실상 3개 사업도 예정대로 진행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기획단은 미래산업 선도기술개발사업 후보 품목으로 490건을 선정한 뒤 1년 동안 세계 최고 석학을 만나고 전문가 800명과 180회 이상의 회의를 거쳐 6개 사업을 엄선했다. 시장성, 기술성, 공공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예컨대 황 단장은 SMR에 대해 “원전의 안전성과 경제성을 담보하고 전기 생산, 지역난방과 담수화 설비에도 쓸 수 있다”며 “전량 수출해 2025년 매출 11조5000억 원을 올릴 수 있는 기술”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평가원의 예비 조사에선 타당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예산 삭감으로 사업 참여를 준비 중이던 대기업과 중소기업들도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이번 사업은 정부와 민간기업이 절반씩 비용을 대는 매칭사업으로 진행된다. 1단계 원천기술 개발 때는 2배수의 컨소시엄을 선정한 뒤, 2단계 최종 응용기술을 개발할 때 그중 1개의 컨소시엄을 선정하겠다는 계획이다. 64개 대기업과 145개 중소기업이 컨소시엄 참여 의사를 밝히는 등 민간 기업들의 호응이 컸다. 그러나 3개 사업이 사실상 백지화되면서 104개 기업이 참여 기회를 잃었고 나머지 3개 사업에 참여하려는 업체들도 예산 축소로 참여 기회가 거의 사라질 처지다.
○ 앞뒤로 위기에 봉착한 기획단
R&D기획단은 4조5000억 원에 이르는 R&D 예산이 관료 중심으로 운영돼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에 따라 민간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돼 지난해 6월 출범했다. 당시 정부는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을 단장으로, 민간 전문가 5명을 MD(Managing Director·투자관리자)로 영입했다. 지식경제부 장관과 황 단장이 기획단 회의의 공동위원장을 맡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백성기 전 포스텍 총장 등 10명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획단은 R&D 예산의 ‘컨트롤타워’ 역할과 300억 원 이상의 미래 먹을거리 사업을 발굴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기존 관료들이 민간 전문가 출신이 포진된 기획단을 견제하기 위해 예산 배정에 인색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기획단의 한 간부는 “사업에 대한 예산을 못 받았다고 조직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며 “예산이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사업은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기획단은 다시 치밀하게 사업을 준비해 정부와 국회를 설득해야 하며 정부와 국회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의 미래 먹을거리 산업 투자에 인색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