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
최근 한 대학 동기의 근황을 접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광화문 사무실에 앉아 영어로 된 법률문서와 씨름하고 있어야 할 아이가 네팔에서 트레킹을 하고 포카라의 헌책방을 뒤지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여행을 떠난 거였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까지 훑는 대장정. 충격, 배신감, 질투 등등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e메일을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바퀴벌레가 세 마리나 기어 나왔지만 와이파이만은 잘되는 숙소 한쪽에서 스마트폰으로 e메일을 쓰고 있다고. 친구는 한 번쯤 해보고 싶던 세계 일주를 하러 무작정 떠났다고 했다. 돈 쓰는 재미, 안락한 삶, 부모님의 기대, 그럴듯한 미래를 모두 포기하고 떠나며 제일 놀란 것은 그녀 스스로였단다. 하지만 막상 새로운 곳에 도착해 보니 사회생활을 하며 익힌 가식 따위는 삶은 닭 껍질처럼(?) 벗겨지더라나…. 그리고 이제 그녀에겐 오염되지 않은 원초적인 뭔가만 남아 있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글을 읽으며 그녀가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는 용단을 내렸단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말로만 떠들어댈 뿐, 결코 결별하지 못하는 그것과.
이제 내 친구를 비롯한 소수의 용자(勇者)들이 결별했으며, 소심한 우리가 아직도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프라이데이’에 대해 설명해 보겠다. 소설가 김언수의 단편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에는 어느 날 문득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는 대기업 사원이 등장한다. 동료들은 갑작스레 회사를 관두고 떠나는 그를 향해 이유가 뭔지 묻는다. 남자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하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18세기 원주민 프라이데이의 유령은 그런데, 21세기에도 여전히 출몰하고 있다.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인님’의 본질은 18세기 프라이데이가 복종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문명과 교화, 교육이란 이름, 혹은 개화나 진화란 명분으로 우리에게 주입된 것들. 입시 경쟁, 취업 전쟁, 성공을 거머쥐기 위한 쟁탈전, 남들만큼 살아야 한다는 압박과 교양 있는 도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어쩌면 현대의 샐러리맨들이 매달 맞는 모르핀인 월급, 회사라는 거대 조직, 가정이라는 정다운 울타리, 자본주의, 과학, 문명화된 삶 자체까지 모조리 프라이데이의 흔적들일 수 있다. 삶의 주인이 돼 있지 못하다는 불안감, 보이지는 않는 뭔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초조함의 기원 역시 프라이데이라는 망령, 주입당한 노예근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는 자들은 말하는 것이다. 이제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하기로 했다, 고.
사람들은 매일 떠든다. “훌쩍 떠나고 싶어”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 하지만 다들 실천에 옮기기를 주저한다. 특히 에릭슨의 발달이론상 막중한 생애과업―결혼, 직업 선택과 경력 발전, 창조적 생산성 발휘―을 앞둔 이 나이에 새삼 자아정체감과 역할 혼미 상태인 ‘생식기’(생애 발달 단계 중 하나로 사춘기와 비슷한 개념·12∼18세)로 퇴행하려니 주변의 지탄이 두렵다. 회사 문 밖을 나서는 순간 글로벌 경기 동반침체, 청년실업, 양극화의 세찬 바람과 싸워야 하는 이런 시대엔 더욱더. 우리가 프라이데이란 촌스러운 이름의 노예가 아니라, 크루소를 만나기 전의 모습인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낯익은 것, 관습, 나를 규정한다고 믿었던 것들까지 모두 부인해 나가야만 한다. 그럴 용기가 없는 우리는 그것을 실행에 옮긴 이들을 향해 질투와 선망 어린 찬사만 보낼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여기의 삶에 우리를 단단히 묶어둔 그것, 떠나보내려 손을 훠이훠이 흔들어 봐도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프라이데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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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이 Humor, Fantasy, Humanism을 모토로 사는 낭만주의자.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부류. 불안정한 모험과 지루한 안정감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