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청춘들은 ‘J에게’ 편지를 썼다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데뷔 때부터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을 동시에 품은 이선희는 1980년대 ‘언니부대’를 이끌어낸 거의 유일한 가수였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평을 듣는다. 동아일보DB
조용필과 김현식, 그리고 이문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선희에게 1980년대는 절정의 시대였다. 박미경 권진원 이상은 박선주 같은 셀 수도 없는 젊은 여성 뮤지션을 배출한 음악 등용문이었던 강변가요제가 촌스러운 파마머리를 한 키 작은 보컬리스트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는 시선을 보냈던 1984년 바로 그해에 이선희는 곧바로 정상권의 슈퍼스타로 급상승한다.
작곡가 송주호가 전곡을 담당하며 ‘아, 옛날이여’와 ‘갈등’ 같은 히트곡을 터뜨린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펄시스터즈와 김추자가 열어 놓은 ‘미스 다이너마이트’ 계열의 후계자임을 증명하는, 젊음의 약동과 후련한 템포가 살아 숨쉬는 당시의 10대 정서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앨범으로 부상했다.
작사 작곡의 명콤비인 양인자-김희갑에 의해 탄생한 ‘알고 싶어요’라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악보의 행간에서 어린 숙녀들이 순정만화처럼 품고 있던 애틋한 감정을 이토록 절실하게 호소하는 보컬은 그 이전과 이후에 찾기 힘들 것이다. 이 패턴은 세련된 음악적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극적 구성법)를 지닌 ‘사랑이 지는 이 자리’와 ‘나 항상 그대를’ 같은 명곡을 작곡한 송시현과 동반하며 절정의 꽃을 피운다.
이선희의 보컬은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의 에너지를 품고 있고 서구적인 발성 속에서도 동양적인 정숙미가 흐른다. 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8집에서 김영동의 ‘조각배’나 ‘한네의 이별’을 리메이크하고 황청원의 시에 김영동이 곡을 붙인 ‘너를 만나고 싶을 땐’이나 김지하 시의 ‘어느 할머니의 극락’, 그리고 그 어떤 사랑노래보다 아름답고 정겨운 ‘언제나 사랑해’를 불렀을 때 이선희는 브라운관과 콘서트의 슈퍼스타의 틀에서 벗어나 더 깊고 광활한 음악의 세계로 비상한다.
이선희라는 이름은 영광과 절망이 교차한 한국 여성 뮤지션 역사의 거대한 방점과 같다. 1994년 9집의 흥행 참패는 그의 음악 이력에서 가장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인연’과 ‘장미’라는 걸작을 만든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리고 성숙한 여인으로 옷을 갈아입은 2005년의 걸작 ‘사춘기’ 앨범을 우리 손에 안겨 주었다.
이선희, 그는 가수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그는 직업적인 음악인이 되기 훨씬 전부터 말보다도 노래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 더욱 편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다. 그는 말했다. “같은 노래를 불러도 나에겐 뭔가 슬픈 힘 같은 것이 있었다.” 아련하지만 강력한 슬픔의 힘. 그것이 이선희 음악의 요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