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선후배 멘토와 멘티 ‘즐거운 수다’
기업은행은 고졸 신입직원들의 은행 정착을 돕기 위해 여상 출신의 책임자급 선배를 멘토로 배정했다. 멘토 박상온 검사부장(왼쪽)과 멘티 김혜인 계장이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며 활짝 웃고 있다. 기업은행 제공
지난 석 달간 여섯 차례 만난 두 사람은 자리에 앉자마자 수다를 떠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잘 모르는 이가 보면 영락없이 다정한 모녀 사이 같지만 실제로는 회사가 짝지어준 ‘멘토-멘티’ 관계다. 두 사람은 박상온 IBK기업은행 검사부 부장(48)과 김혜인 삼양동지점 계장(18).
기업은행은 올해 상반기 신입직원 공채에서 1996년 이후 15년 만에 처음 특성화고 출신 직원 20명을 선발했다. 이는 사회 각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은행, 공기업, 대기업 등에서 잇따른 고졸 채용 바람의 기폭제가 됐다. 7월 1일자로 기업은행에 들어온 신입 직원 20명은 8일로 ‘입행 100일’을 맞았다. 기업은행은 아직 10대 소녀인 신입직원들이 생소한 은행 업무를 익히고, 조직생활에 적응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보고 여자상업고 출신의 대선배인 책임자급 직원 20명을 멘토로 배정했다.
○ ‘멘토님 없었으면 큰일 났을 뻔’
아직 10대인 김 계장에게 은행원 일은 쉽지 않다. ‘왜 어린애를 창구에 앉혀 놨느냐’고 타박하는 고객이 있는가 하면 100만 원을 주고는 130만 원을 맡겼다고 우격다짐하면서 목소리를 되레 높이는 고객도 있다. 혼자 화장실 문을 잠근 채 운 적도 많다. ‘계장’ 직함도 아직 어색하기만 하다.
김 계장은 그럴 때마다 ‘멘토’ 박 부장한테 업무 처리법, ‘진상’ 고객 상대법 등의 노하우를 물었다. 대학 진학준비를 하는 데도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김 계장은 “부장님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은 은행원이 되려면 3정, 즉 ‘사람에게는 정직하고, 고객에게는 정성을 다하고, 은행 업무는 정확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정규직 전환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요령도 알려주셨다”면서 “이런 조언이 없었으면 은행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고마워했다.
기업은행 고졸 행원들은 2년 동안 계약직 신분을 유지하면 무기계약직이 된다. 이때 자격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무기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 25년 전 박 부장이 정규직이 된 것처럼 ‘멘티’ 김 계장도 벌써부터 정규직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김 계장은 대학 진학을 위해 은행 업무가 끝난 뒤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부장님처럼 대학에 진학해서 국제금융을 전공하고 싶다”며 “외환 전문가로 은행을 오랫동안 다니는 게 꿈”이라고 했다. 박 부장은 “요즘 부모나 사회환경을 탓하는 젊은이가 많은데,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인생을 잘 개척해 나가고 있는 김 계장을 볼 때마다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이 들어 더 잘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1981년 기업은행에 입행한 박 부장은 김 계장의 성암국제무역고(옛 성암여상) 30년 대선배다. 스물네 살 대학생 아들을 둔 박 부장은 입행 후 주경야독에 힘써 국제금융 전공으로 석사학위까지 땄다.
1986년 합격률이 20%도 안 되는 전직시험을 거쳐 정규직이 된 뒤 과천중앙지점장 등을 거쳐 올 7월 본점의 주요 부서인 검사부 부장으로 발탁될 정도로 고졸 출신 직원들의 대표적인 역할모델로 꼽힌다.
내년 2월 성암국제무역고를 졸업하는 김 계장은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한 살 위 청각장애인 언니를 돌보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도 밝고 명랑한 심성을 잃지 않았다. 학업 성적도 뛰어나 같이 입행 시험을 치른 성암국제무역고 학생 5명 중에서 유일하게 합격했다. 입행 전부터 기업은행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있던 김 계장은 면접에서 “장학금 돌려 드릴 테니 대신 저에게 월급을 주세요”라는 당찬 발언으로 면접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박 부장은 “나도 성암여상을 졸업하고 강북구 삼양동 지점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혜인이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해서 더 반가웠다”며 “언제나 딸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딸을 얻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