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같은 로마, 관중석은 그냥 미친다
1일 AS로마의 홈경기장인 스타디오 올림피코의 쿠르바 수드(남쪽 관중석)가 팬들로 가득 찼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이미 응원은 시작됐다. 조영래 우승호 제공
하지만 그 경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뼈아픈 기억이다. 억울하다며 두 손을 맞붙여 흔들면서 항의하던 이탈리아 선수는 오죽했으랴. 그가 바로 프란체스코 토티다. 토티는 1993년 이탈리아 프로축구 1부 리그 세리에A의 AS로마에서 데뷔해 35세인 지금껏 그 팀에서만 뛰고 있다. 팬들은 이 우직한 남자를 ‘로마의 황태자’라고 부른다. 황태자의 고향, 로마로 갔다.
○ 황태자를 만나러 가는 길
지난달 28일 로마의 황태자를 ‘알현’하기 위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이탈리아행 여객선을 탔다. 꼬박 하루 만에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치비타베키아 항구에 내렸다. 로마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잘 닦여 있었지만 무척 어두웠다. 기름을 채우러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트럭 운전사들이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한 잔에 1.4유로(약 2200원), 양은 한국에서 파는 것의 절반가량이었다. 카푸치노는 우유를 섞은 커피에 계핏가루를 뿌린 이탈리아식 커피. ‘원조 동네’인 이탈리아에서 마시는 첫 잔이라 그런지 맛이 일품이었다.
로마의 플라미니오 빌리지 캠핑장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차에 부착된 내비게이션은 길을 잃었고 교통표지판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늦은 밤이어서 길 위에는 ‘길거리 여성들’뿐이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주변만 한 시간여 배회하니 이들조차 우리를 외면했다. 겨우 캠핑장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화장실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설이 훌륭했다.
로마 트레비 분수 근처에 있는 AS로마 스토어에서 팬들이 표를 사고 있다(위 사진). 이곳에서는 AS로마 팬티까지 팔고 있다. 아기용도 있다. 조영래 우승호 제공
AS로마의 경기 입장권은 경기장이 아니라 로마시내 트레비 분수 인근의 ‘AS로마 스토어’에서만 판다. ‘로마의 휴일’에서 그랬던가. 동전을 한 개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두 개를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게 된다는 분수. 오드리 헵번을 머릿속에 그리며 동전을 하나만 던졌다. 너무 간절하게 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지 판매 마감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했다. 한국에서 왔다며 표를 팔라고 매달렸지만 허사였다. 다음 날 다시 들르니 ‘아뿔싸’, 쿠르바 수드는 전석 매진. 안타깝지만 반대편 쿠르바 노르드(Curva Nord·북쪽 관중석) 표를 샀다.
○ 토티는 특별하다.
1일 AS로마의 홈구장인 스타디오 올림피코로 향했다. 경기시간이 가까워지자 팬들이 몰려든다. AS로마 유니폼을 입고 대형 깃발을 흔들며 트램(전차) 역에서 경기장을 잇는 다리를 건너오는 군중이 마치 출정하는 로마병사 같았다. 바르셀로나와 달리 부모와 함께 온 아이가 많았다. 몸에 맞지도 않는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토티가 유니폼을 받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유니폼 하의를 벗어준 일화가 생각났다.
로마 트레비 분수 근처에 있는 AS로마 스토어에서 팬들이 표를 사고 있다(위 사진). 이곳에서는 AS로마 팬티까지 팔고 있다. 아기용도 있다. 조영래 우승호 제공
경기 시작 직전 관중이 모두 일어섰다. 무슨 일인가 싶은데 갑자기 웅장하게 ‘로마 로마 로마’로 시작하는 노래를 합창했다. 이 노래는 이탈리아 칸초네 가수 안토넬로 벤디티가 부른 곡으로 AS로마의 공식 노래란다. 아주 서정적인 발라드인데 경기장에서 들으니 마치 검투사들의 싸움을 앞둔 듯 사뭇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반복되는 ‘로마 로마 로마’가 입에 달라붙어서 경기가 끝난 뒤 우리 입에서도 ‘로마 로마 로마’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황태자에 대한 대접은 남달랐다. 마지막 무대를 조용필이 장식하는 것처럼 경기장에서 마지막에 소개되는 선수는 언제나 토티. 장내 아나운서가 그의 이름 프란체스코를 선창하면 모든 관중이 “토티∼”라고 외친다. 경기도 토티가 중심이었다.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맏형’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토티는 어슬렁거리면서도 ‘동생들’에게 날카롭게 패스를 넣어주며 3 대 1 승리를 이끌었다. 경기 후반 교체돼 운동장을 나갈 때도 기립 박수를 받았다. 가끔 상대방 선수에게 침을 뱉고 때리기도 하는 토티의 돌발 행동이 없어서 조금은 싱거운(?) 느낌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오토바이나 스쿠터를 타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우리도 ‘로마의 휴일’에서처럼 스쿠터를 타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레고리 펙’만 둘이다. ‘오드리 헵번’이 필요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