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 R&B힙합 펑키… K-pop의 이정표가 되다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김건모는 다양한 욕구를 분출한 1990년대 청년층을 모두 만족시키겠다는 듯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냈다. 동아일보DB
1992년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김건모가 데뷔한 지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1990년대와 2000년대라는 비정한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뮤지션 중에서도 가장 많은 히트곡을 기록한 인물이며 1995년 벽두에 발표했던 네 번째 앨범이 기록한 280만 장이라는 판매량은 아마도 깨지기 힘든 불멸의 전설로 남을 것이 명백하다.
김건모는 멀티 밀리언 시대에 멀티 장르를 지배한 멀티 엔터테이너였다. 라인기획의 수장 김창환과 더불어 철저한 훈련과 정교한 전략을 바탕으로 빈틈없는 완성도를 지닌 ‘핑계’를 앞세운 2집(1993년)을 제작했고 이 앨범은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가 담긴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앨범과 더불어 1990년대 주류 대중음악의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수많은 경쟁자와 구별되는 김건모의 가장 중요한 재능은 이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는 비범한 보컬이다. 그는 그의 앞 세대를 장악했던 슈퍼스타들처럼 강인하고 드라마틱한 흡인력보다는 거의 본능적인 리듬감으로 각 악절의 매력을 시원시원하게 풀어간다. 그의 보컬은 사색과 성찰을 거부하고 감성의 질주에 몸을 맡기려는 1990년대 세대의 기호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김건모에게 절정의 영광을 안겨준 ‘잘못된 만남’으로 불붙은 속도 경쟁의 가혹한 비트 감각은 하루가 바쁘게 표변하는 현대 대중문화의 감수성을 은연중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7년의 다섯 번째 앨범 ‘Myself’부터 그는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한다. 인트로를 포함해 무려 열다섯 트랙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앨범의 볼륨이 말해주듯이 이 앨범은 이립(而立)의 경계를 넘어선 김건모 개인의 방향 전환에 대한 숙고였고, 속력과 영상 이미지로 아롱졌던 1990년대 주류 대중음악 문법에 대한 종합적인 성찰이며, 한국 음반 시장의 주력을 형성해온 10대 아이돌 음악의 매너리즘에 대한 회의에 찬 질문서였다.
속도의 복마전에서 벗어나 더욱 성숙한 사랑의 드라마를 구축한 자작곡 ‘사랑이 떠나가네’와 대구를 이루는 것은 1990년대 초 벗님들의 ‘당신만이’를 리메이크한 트랙이다. 그는 이 아름다운 소프트 록 넘버를 1990년대의 감성으로 재창조한다. ‘당신만이’에서 2011년 ‘You are My Lady’에 이르는 그의 리메이크 리스트는 김광석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도들이다.
앨범이 거듭할수록 그는 더 유연해지고 음영이 짙어졌지만 목소리의 광채는 사라지지 않았다. ‘허수아비’나 ‘잔소리’, ‘정’ 같은 2000년대의 노래들은 비록 메가히트를 기록하지 못했어도 충만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절창들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