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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방랑식객’의 한식 세계화

입력 | 2011-10-17 03:00:00


여러 개의 매직펜을 한 손에 잡고 꾹꾹 눌러 점을 찍어가는 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종이에 붉은 꽃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흰눈이 섞이기 시작했다. 일요일 오후 서울 청담동 골목 한구석의 야외 테이블. 가을바람에 한기가 느껴졌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연요리연구가 산당(山堂) 임지호 씨(55)가 자신의 책을 선물하면서 서명을 하는 참이다. 10분쯤 지나자 책 속지에 분홍 꽃이 만개했다. 그가 개인전을 가질 정도로 그림 실력도 출중하다는 점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의 별명은 ‘방랑식객’이다. 자연요리연구가라는 거창한 타이틀보다 그 별명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일본에 가고 싶어 열두 살 때 무작정 집을 나왔다. 기차와 배를 몰래 얻어 타고 도착한 곳은 제주도. 거지처럼 떠돌다 배가 고파 어느 식당 쓰레기통에 숨어든 밤, 불벼락을 맞는다. 식당 주인이 아직 불이 남아 있는 연탄재를 버린 것이다. 불쌍하게 여긴 식당 주인이 식당 보조로 그를 거뒀고, 요리 인생이 시작됐다. 한식당 중식당 분식집까지, 요리를 배우며 전국을 돌았지만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방랑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국내외를 돌며 만난 이들에게 주변 재료로 치유의 밥상을 차려주는 모습이 방송을 타면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책도 펴냈고, 식당도 두 곳에 냈다. 특히 해외에선 한식 관련 행사만 있으면 빼놓지 않고 초청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 정도면 이젠 자신의 분야에서 성취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

두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면서 몇 가지 생각해 볼 대목을 발견했다. 요리에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셰프가 됐고, 미술도 개인전을 열 정도지만 그는 정규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해외 유명 레스토랑이나 전문 요리 교육기관, 미대 출신이 우대받고 서로 이끌어주는 현실에서 그의 성공 사례는 돋보인다.

또 하나는 애초에 그의 가치를 알아준 것은 한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의 자연요리에 해외에서 먼저 주목했다. 미국 유명 음식잡지 푸드아트는 2006년 12월 한식을 테마로 하면서 그를 표지모델로 내세웠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수백 개 매장을 가진 해외 호텔 체인의 오너가 자신의 호텔에 식당을 내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직접 와 있었다. 국내 기업들도 해외에 식당을 내는 일이 종종 있지만 연락해 온 적이 없다고 했다. 여전히 그는 국내에선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홍석민 산업부 차장

한식 세계화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임 씨는 세계화라는 용어부터 잘못됐다고 말한다. ‘프렌드십’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을 친구와 공유한다는 생각이어야 하고, 음식은 자연이자 자유라는 철학과 스토리를 실어서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고기와 김치찌개가 맥도널드 햄버거와 다른 점이 뭐냐”고 물었다는 싱가포르 교수의 질문을 전했다. ‘맛만 있으면 되겠지’ 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방랑식객은 1998년 경기 양평에 식당을 낸 데 이어 지난해 말 청담동에 진입했다. 대한민국 유행의 중심지로 꼽히는 청담동에 식당을 낸 것은 상징적이다. 국내 메인 스트림에서 인정받기 위한 시험대에 오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더 큰 꿈을 꾸고 있지만.

홍석민 산업부 차장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