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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진영]부자 미디어, 가난한 민주주의

입력 | 2011-10-18 20:00:00


이진영 문화부 차장

요즘 ‘개콘’만큼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오디오 파일로 유통되는 시사 토크쇼 ‘나는 꼼수다(나꼼수)’이다. ‘딴지일보’의 김어준 씨가 ‘이명박 대통령 헌정 방송’이라는 수식어를 내걸고 올해 4월 말 시작한 인터넷 방송인데 매주 금요일 새 파일이 올라오면 온라인은 나꼼수 방송 내용으로 도배가 된다. 일주일간 조회수가 170만 회로 아이튠스 팟캐스팅 1위라는 기록도 있다. 서버 관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달 말 여는 1400석 규모의 나꼼수 토크 콘서트는 표를 팔기 시작한 지 20분 만에 매진됐다. 나꼼수의 활자 버전인 김 씨의 책 ‘닥치고 정치’는 출간 10일 만에 베스트셀러 순위 2위에 올랐다.

‘꼼풍’을 일으키고 있는 나꼼수는 디지털 언론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법적으로 공정할 의무가 없는 데다 정부에 등록된 인터넷 언론만 2900개가 넘는 현실에서 돈 안 들이고 살아남는 전략은 선정성과 편향성이다. 나꼼수는 대놓고 편파적이다. 1회 ‘BBK 총정리’부터 23회 ‘홍준표 대표 초청 관훈토론회’까지 대부분이 여권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17회 ‘곽노현 10·26사건’에 대해서는 진보 진영에서도 “심했다”는 비난이 나왔다.

검증한 뒤 보도하는 전통 언론과 달리 디지털 언론은 일단 터뜨린 뒤 검증을 받는다. 소문이나 억측 같은 사실 확인을 거쳐야 하는 뉴스의 원재료들이 바로 상품이 된다. 나꼼수에도 솔깃한 음모론들이 등장한다. ‘서태지-이지아의 이혼소송 기사가 터진 건 BBK 관련 기사를 덮기 위한 초대형 떡밥’이었고, ‘4대강 건설에서 수심 6m 판다고 정부 돈을 받은 뒤 5m만 파면 2조 원이 남는데 그 돈을 각하가 가져갔을 수 있다’는 식이다. 온갖 음모론을 사실인 양 얘기한 뒤 “터무니없는 소설이다. 각하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다”라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나꼼수가 공론장의 부활이라 하지만 열린 뒷담화장이자 악성 댓글의 종합상자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언론 선진국 미국에서도 풍부한 매체가 사회에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내외 언론학과 필수 교재인 ‘저널리즘의 기본요소’의 저자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은 신간 ‘텍스트읽기 혁명’에서 1979년 미국에서 발생한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월터 리프먼의 ‘신문은 민주주의의 성경’이라는 구절을 가슴에 새긴 당시 언론은 대형사고 보도 때 써서는 안 되는 형용사를 골라내는 신중함으로 사람들이 사고 발생 나흘 만에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만약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이 사고가 터졌다면 걸러지지 않은 억측과 주장들이 인터넷을 통해 쏟아져 사고보다 더한 혼란을 야기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인터넷 강국인 한국은 천안함 사건과 동일본 대지진 때 이미 겪었던 시나리오다.

나꼼수가 성공했으니 비슷한 프로가 수도 없이 생겨날 것이다. 자매프로 ‘나는 꼽사리다’는 곧 방송을 한다는 소식이다. 보수 진영에서도 ‘박원순 후보의 부친은 정신대 모집책이었다’는 미확인 설을 풍자에 은근슬쩍 사실처럼 끼워 넣는 프로가 나올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언론을 향유하게 된 사람들은 검증의 책임도 져야 한다. 스스로 깨어 있지 않으면 미디어는 풍요로우나 민주주의는 가난한(rich media, poor democracy) 시대를 살아야 한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