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주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멀리서 온 손님을 극진하게 대우했다. ‘피로 맺어진 동맹’이라고도 불리는 양국의 안보관계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미 의회 통과로 경제적 일체감까지 생겼으니 이 같은 환대는 당연하지 않을까. 총리가 해마다 바뀌며 존재감이 떨어지고 있는 일본과는 대조적이다.
일본 국회에서도 지금까지 3명의 한국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한일 양국에 가로놓여진 과거사를 딛고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마음의 벽을 넘어 진정한 이웃이 되자”고 호소했고,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분쟁과 갈등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자”고 선언했다. 1998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기적은 기적처럼 찾아오는 게 아니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이들 모두 큰 박수로 환영받았다.
의궤 일부 90년만에 한국 귀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노다 총리의 방문에는 한 가지 역사적인 성과가 있었다. 일본 궁내청에 있던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이 일부나마 드디어 실현됐다. 약 90년 만의 귀환이다.
한국이 강하게 반환을 요구한 조선왕실의궤는 최근 일본에서도 그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계기가 된 것은 NHK가 방영 중인 한국 드라마 ‘이산’ 덕분이다. 필자도 즐겨 보고 있는 이 드라마에는 도화서(圖畵署)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곳에서 왕실의 갖가지 의식(儀式)을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 의궤다. 드라마에서는 의궤가 명백한 증거가 돼 모반의 누명을 벗는 극적인 장면도 나온다.
그럼 왜 조선왕실의궤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일까. NHK가 올해 여름 방송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도 그 수수께끼가 풀려 소개하고 싶다. 궁내청에 잠자고 있던 각종 문서를 철저하게 조사해 그 답을 찾아낸 것은 규슈대학과 사가대학의 연구팀이었다. 이들 연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경위가 있다.
일본식 장례를 치른 것은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의 체면을 훼손한 것이라는 담당관의 반성이 궁내청 기록에 남아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일본 정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선 왕실의 의례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듬해인 1920년 궁내청은 조선총독부에 조선왕실의궤를 입수하도록 지시했고 1922년에 실현됐다. 조선왕실의궤는 똑같은 판본이 여러 개 제작돼 각각 다른 장소에 보관돼 있었는데 그중 한 개가 일본으로 넘어왔다.
연구의 성과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926년 순종의 장례식 때였다. 이번에는 행렬 형식이나 장식품의 위치 등 모든 것이 조선왕실의궤에 있는 대로 치러졌다. 장의위원회에는 한국인도 멤버로 참가했다. 다만, 전통에 따라 관 앞에 게양하는 깃발에 ‘황제’라고 쓰자는 한국 측의 제안은 ‘이왕(李王)’임을 주장한 일본이 거절했다. 양국은 격론 끝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깃발을 거는 것으로 타협했다.
당시 기록에는 ‘조선 고유의 의식대로 치러 조선 백성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했다’고 돼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강압적인 동화정책에서 융화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지만 조선 왕실의 장례가 일본인의 손에 의해 치러지는 것을 보면서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아마도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일반 공개땐 많은 일본인 보러갈것
여하튼 조선왕실의궤는 아름다운 회화 작품이다. 일본에서는 일반인에게 공개된 적이 없지만 한국에서 공개되면 많은 일본인도 보러 갈 것이다. 양국의 불행한 역사와 한민족의 문화적 자부심에 공감하게 될 것이고, 드라마 이산 속의 첫 여성 화원(畵員)인 아름다운 송연도 떠올릴 것임에 틀림없다.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조선왕실의궤가 이렇게 되살아나기를 소망한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