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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처녀얼굴, 아버지 낫에… “이런 불행 이젠 끝나겠죠?”

입력 | 2011-10-27 03:00:00

■ 가정폭력 피해女, 경찰개입 특례법 시행에 “늦었지만 다행”




 

“법이 조금만 빨리 시행됐다면 우리 가족도, 제 얼굴도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텐데….”

26일 기자와 만난 가정폭력 희생자 A 씨(21·여)는 과거 일을 떠올리며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다. A 씨의 왼쪽 눈썹에는 커다란 흰색 반창고가 두껍게 붙어 있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휘두른 낫에 찔린 상처였다. A 씨가 손바닥으로 막았기 때문에 실명은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눈썹 부위를 27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10일 밤이었다. 친구와 차를 마시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서울 관악구 신림동 자택으로 돌아온 A 씨를 맞은 건 잔뜩 술에 취한 아버지였다. 일용직 노동자인 아버지는 다짜고짜 A 씨에게 “술 마실 돈을 내놔라”며 행패를 부렸다. 참다못한 A 씨가 “가족에게 왜 이러느냐”고 맞서자 아버지는 낫을 휘둘렀다. 낫에 찔린 A 씨는 집을 뛰쳐나와 병원으로 갔다. 이 광경을 목격한 어머니 이모 씨(47)도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수면제 수십 알을 삼켜 병원으로 실려 갔다. 다행히도 이 씨는 목숨은 건졌다.

A 씨는 응급치료를 받은 뒤 11일 새벽 “아버지로부터 가족을 보호해 달라”며 관악경찰서를 찾았다. 하지만 경찰은 “현행범이 아닌 데다 정식으로 고소장을 내지 않아 체포할 수 없다”며 “법원으로부터 판결을 받지 않으면 경찰이 임시 조치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집으로 돌아온 A 씨는 방에서 쓰러져 자고 있는 아버지 몰래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집을 나왔다.

가정폭력의 그늘 속에 살았던 A 씨 가족의 불행은 이날 하루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할 때마다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행패를 부렸다. A 씨의 언니가 결혼 후 주소도 숨기고 살 정도였다.

A 씨 아버지처럼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이들 중 상당수는 상습범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6년부터 올해 7월 말까지 경찰에 검거된 가정폭력범은 한 달 평균 955명에 이른다. 특히 2007년 전체 가정폭력으로 검거된 1만3165명 중 동종 전과가 있는 사람은 1002명이었지만 2010년에는 검거된 가정폭력범이 7992명으로 줄었는데도 동종 전과자의 검거 건수는 1619건으로 오히려 늘었다. 공권력이 막지 않는 한 한번 시작된 가정폭력은 계속되는 경향을 보이는 셈이다.

 

하지만 경찰은 그동안 가정폭력 사건에는 미온적으로 대처해 왔다. 가정폭력 사건의 경우 경찰이 가해자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려면 법원의 피해자보호명령이 필요하지만 청구부터 결정이 나올 때까지는 최소 일주일 정도 걸려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26일부터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시행됨에 따라 경찰이 심한 부부싸움 등 가정폭력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됐다. 법에 따라 경찰관은 현장에서 가정폭력이 재발할 우려가 있거나 법원의 결정을 기다릴 여유가 없을 만큼 상황이 긴급하다고 판단할 경우 피의자에게 △주거지 퇴거 등 격리 △피해자 100m 이내 접근 금지 △전기통신을 이용한 피해자 접근 시도 금지 등의 조치를 임시로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피해자가 요청할 때도 같은 조치를 내릴 수 있다.

또 검사의 청구와 판사의 판단을 거치면 이 조치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피의자가 조치를 어기면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리거나 최장 2개월까지 유치장에 가둘 수도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특례법 시행으로 가정폭력이 더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A 씨는 “경찰이 아버지의 폭력을 초기에 막았다면 가족과 내 인생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며 “우리 가족과 같은 일이 다른 가정에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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