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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재보선]After 10·26… 정당정치 ‘무장해제’

입력 | 2011-10-27 03:00:00

‘시민단체 출신 첫 서울시장 당선’이 한국정치에 새긴 5가지 변혁




《 사상 첫 시민단체 출신 서울시장을 탄생시킨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한국 정치를 2011년 10월 26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만한 정치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 정치에 가장 강력한 회오리가 몰아쳤다는 얘기다. 》
[1] ‘e-폴리틱스’의 위력

이번 선거는 ‘e-폴리틱스’의 위력을 뚜렷이 증명했다. 선거 기간에 일반인의 정치적 의사 개진은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주부와 학생, 심지어 청년실업자까지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든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일상을 소재 삼아 정치를 이야기했다.

SNS 텍스트분석 전문회사인 트윗믹스의 분석에 따르면 4·27 재·보선 기간에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후보들의 이름이 들어간 트윗 건수는 9만5792건이었던 데 비해 이번 선거 기간에는 ‘나경원’ ‘박원순’ 이름이 거론된 트윗은 98만5158건으로 10배가 넘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팔로어(26일 현재 97만6774명)가 있는 소설가 이외수 씨 등 일부 유명인사는 SNS를 통해 기성 정치인 못지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박 후보의 승리 요인 중 하나도 SNS에서 지지층을 넓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후보는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25일 오후 10시부터 2시간 동안 동대문시장 인근에서 시민들과 스마트폰으로 ‘인증샷 놀이’를 하며 SNS 민심을 파고들었다. 그 시간 나 후보는 명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전통적인’ 거리 유세를 폈다.

[2] 정당정치 무력화

이번 선거는 여야를 막론하고 기성 정치권의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와 실망을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확인시켜줬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이번 선거를 거치며 유권자들의 고통을 대변해 줄 세력이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정당정치의 존재 이유가 희박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기성 정당으로는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하는 유권자들의 여론 패턴을 따라잡을 수 없는 만큼 정당 조직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실제로 박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오프라인 조직은 최소화하고 대부분의 선거 홍보를 인터넷과 SNS에서 진행했다.

아울러 ‘공천과 검증’이라는 기존 정치권 충원 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장훈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등장으로 이제는 정치 엘리트의 충원 주체가 정치권에서 부분적으로 유권자로 옮겨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총선부터 ‘나는 가수다’ ‘슈퍼스타 K’ 같은 서바이벌 공천 방식이 탄력받을 것이라는 얘기다.

[3] 지역, 여야 충돌 아닌 가치 충돌

그동안 한국의 정치구도를 지배했던 지역 갈등과 여야 충돌 대신 본격적으로 가치 충돌이 발생했다. 선거 초기엔 무상급식을 둘러싼 복지 이슈로 시작해 나중에는 보수와 진보 간 대대적인 가치 충돌로 번졌다. 상대에 대한 검증과 네거티브 공세도 이 같은 가치 충돌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나경원 후보 측은 박 후보의 대북관을 집중 공격했고 병역 의혹, 학력 허위 의혹 등을 잇달아 제기하며 “이런 것들이 시민단체가 주장해 온 가치냐”고 주장했다. 박 후보는 거꾸로 다이아몬드 가격 축소, 연회비 1억 원의 피부전문의원 출입 의혹 등을 제기하며 보수의 ‘웰빙’ 지향적 가치를 비판했다.

가치의 충돌은 자연스럽게 양측을 지지하는 세대 간 충돌로 이어졌다. 보수성향 단체인 어버이연합 등은 22∼25일 박 후보의 사상 검증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4] 시민단체-정치권 경계 무너져

박 후보로 상징되는 시민단체 세력의 전면 등장으로 기성 제도권을 비판하고 견제해 온 이들의 순수성은 그만큼 상실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시민단체 세력이 한국 정치의 중심에 진입하면서 정치권 견제의 주체와 대상이 뒤섞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윤평중 교수는 “박 후보의 승리가 한국 시민사회세력의 미래를 위해서는 좋은 소식으로만 보기 어렵다”며 “시민사회세력은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독립할 때 가장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시민운동의 대표적 인물이 현실 정치에 투신하면서 앞으로 누가 무슨 운동을 하든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5] 선거 캠페인의 변화

이번 선거는 어느 때보다 상대방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가 극심했지만 동시에 어느 때보다 돈, 대규모 유세, 조직 동원이 줄어든 ‘3무(無) 선거’로 기록될 만하다. 박 후보와 나 후보는 각각 ‘경청 유세’와 ‘조용한 유세’라는 콘셉트로 서울 골목골목을 파고드는 방식을 택했다. 광화문광장 등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만 선택적으로 대규모 유세를 벌였다.

SNS 기반 여론 형성이 활발해지다 보니 자금을 통한 조직 동원은 어느 때보다 미약했다는 게 공통된 평가다. 양측 모두 모금 상한액인 38억8500만원 안팎의 선거자금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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