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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재보선]원칙-소통-변화… “탈정치” 50일만에 정치 한복판에 서다

입력 | 2011-10-27 03:00:00

인권변호사 → 시민운동가 → 시장… 박원순 스토리




“시민은 권력을 이기고 투표는 낡은 시대를 이겼다.”

27일 0시 10분. 당선이 확정된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가 종로구 안국동 캠프 사무실을 찾아 당선 소감을 밝히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민주당 손학규 대표, 박영선 의원, 이인영 최고위원, 이해찬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야권 인사들과 200여 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서울시장 박원순!”을 외쳤다. 박 당선자는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선택했다”며 “시민의 분노, 지혜, 행동, 대안이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이뤄내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벽면을 가득 장식한 1000여 개의 노란색 바람개비가 벽면을 가득 장식해 ‘서울에 불어온 새로운 바람’의 등장을 알렸다. 지난달 6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단일화 합의 이후 꼭 50일 만이었다. 사상 최초로 시민단체 출신 서울시장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10분가량 당선 소감과 취재진과의 일문일답을 마친 뒤 손 대표 등과 일일이 악수하며 감사를 표시한 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이동해 자신을 지지해 준 500여명의 시민들과 만났다. 박 당선자는 이 자리에서도 “진실이 거짓을 이겼으며 시민이 이겼다. 우리 모두가 이겼다”고 말했다.

○ “민주당, 혁신과정에 함께할 것”

박 당선자는 24일부터 41시간 반의 철야 유세가 꽤 힘에 부친 듯 매우 지쳐보이고 한층 야위었다. 그러나 쉰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그는 “통합과 변화의 길에서 함께 한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시민사회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연대의 정신은 시정을 통해 구현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러 야권의 정치 지도자 그리고 정당원들이 하나돼 열심히 뛰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며 “처음에는 가는 길이 틀렸지만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함께 뛸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어 “사람과 복지 중심의 시정이 구현될 것이다. 제일 먼저 서울시의 따뜻한 예산을 챙기겠다”며 “보편적 복지는 사람 중심의 서울을 만드는 새로운 엔진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향후 시정과 관련해서는 “선거 구호였던 ‘서울, 사람이 행복하다’가 시정의 좌표가 될 것”이라며 “사람과 복지 중심의 시정이 구현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취임 첫 과제로 “따뜻한 예산을 챙기겠다. 서민에게는 11월이면 벌써 한겨울”이라며 “취임 즉시 공무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시의원들과 생각을 조율해 서민들의 월동 준비를 하겠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입당 문제에 대해서는 “민주당은 바닥 현장에 이르기까지 정말 열심히 뛰었다. 제가 큰 빚을 졌다”면서도 “민주당이 민주주의와 야권의 맏형으로서 혁신과 변화를 주도하는 정당의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보고 그 과정에 함께 하겠다”고 즉답을 피했다. 그는 “이번 선거가 네거티브전으로 치러지면서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슬펐다”고도 했다.

○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꿈을 먹고 살아온 사람.”

선거운동 기간 동안 박 당선자 곁을 그림자처럼 지킨 송호창 캠프 대변인이 그를 일컬어 표현한 말이다. 검사에서 인권변호사로, 또 시민운동가에서 서울시장까지 줄곧 ‘모험’을 택한 그의 도전적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 당선자의 등장은 ‘기성 정당과 시민사회 세력의 맞대결’이라는 새로운 선거구도를 만들며 정치권을 흔들었다. 안철수 대학원장과의 9·6 단일화 선언 이후 5% 안팎의 지지율이 50% 안팎으로 수직 상승하며 선거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3일 야권통합경선에서는 50여 년 전통의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야권 단일 후보로 선출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시민운동 과정에서 축적한 폭넓은 인맥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기반을 둔 선거운동은 가장 큰 무기였다. ‘박원순 펀드’ 개설 47시간 만에 목표 선거자금인 38억5000만 원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 레이스 중반 한나라당의 본격적인 검증 공세가 이어지면서 위기도 많았다.

먼저 몇몇 저서에서 ‘서울대 법대 1학년 중퇴’라고 쓴 것을 두고 의도적으로 학력을 속인 게 아니냐는 공격을 받았다.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행방불명된 작은할아버지의 양손(養孫)으로 입적된 사실은 ‘군 단축근무를 위한 병역 기피용 아니냐”란 비난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자신이 몸담았던 ‘아름다운재단’이 대기업으로부터 수백억 원의 기부금을 받은 게 공개되면서 “협찬 인생을 살았다”는 공격에도 시달렸다.

경남 창녕에서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 박 당선자는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해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반대하는 교내시위에 나섰다가 투옥됐고 학교에서도 제명됐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고 사법시험 22회(1980년)에 합격했다. 대구지검 검사로 임용됐으나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1986년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부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4년 참여연대를 만들어 시민운동가로서 사회개혁 분야에 투신했다. 2000년 4월 총선 때엔 낙천, 낙선 운동을 주도하면서 선거운동의 지형을 바꿨으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50만 원의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2002년부터 올 9월까지는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를 맡아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이제 서울시장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 평소 자신의 직업을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고 소개해온 그는 앞으로 서울을 어떻게 디자인할까.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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