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지형 대격변… 대선판도 요동
○ 박근혜의 득실
부친 추도식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26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32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박 전 대표는 2007년 대선 이후 약 4년간의 침묵을 깨고 이번 선거의 전면에 나섰다. 사실상 내년 12월 대선을 향한 대장정을 시작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특히 선거 막판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야권 무소속 박원순 후보의 선거캠프를 방문해 공개지지 발언을 하면서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박근혜 대 안철수의 싸움’이라는 성격이 더해졌다.
박 후보가 여유 있는 표차로 당선됨으로써 ‘안풍(安風·안철수 바람)’의 실체가 확인된 셈이다. YTN 여론조사 결과 박 전 대표의 나경원 후보 지지 효과는 19.1%, 안 원장의 박 후보 지지 효과는 28.6%로 나타났다.
박 전 대표는 6일 처음 선거 지원을 선언하며 ‘정당정치의 위기’에서 지원 이유를 찾았다. 공식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25일에도 “책임 있는 정치가 되려면 정당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의 메시지는 울림이 작았다.
박 전 대표의 가장 큰 위기는 ‘기성정치’ 대 ‘제3세력’의 대결이란 이번 선거의 프레임에서 그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갈망’은 일단 박 전 대표로 상징되는 ‘정당정치’가 아닌 안 원장으로 상징되는 ‘제3세력’의 손을 들어줬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런 흐름은 내년 총선과 대선 국면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기성정치에 염증을 느낀 20, 30대와 소통의 길을 열고 진보와 보수가 혼재된 40대를 끌어들이지 못하면 박 전 대표의 지지세 확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친이(친이명박)계 일부에서 “안 원장에게 맞설 다른 후보도 물색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꿈틀댄다.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보는 일각에서는 정몽준 전 대표,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재오 전 특임장관 등 범친이계 주자들을 중심으로 ‘대안론’을 모색할 가능성도 있다.
선거 중반 여론조사에서 나 후보의 지지율 상승세에 고무돼 있던 친박(친박근혜)계는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다. 친박계의 반론도 있다. 당초 20%포인트 가까이 뒤졌던 나 후보의 격차를 좁힌 데는 ‘박근혜 효과’가 한몫했다는 얘기다. 또 서울시장 외에 한나라당 기초단체장이 출마한 곳에선 모두 승리한 점을 함께 봐야 한다는 것. 한 의원은 “박 전 대표의 지원 유세가 막판 표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선거의 여왕’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또 박 후보의 당선이 박 전 대표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박 후보와 시민단체가 주축이 된 ‘제3세력’이 서울시정을 어떻게 운영하는지에 따라 내년 정치 국면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정당정치 바로 세우기’를 강조한 박 전 대표는 ‘신뢰와 소통’을 위한 행보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수첩공주’라는 이름의 계정을 연 것도 그 일환이다.
○ 안철수의 득실
투표 마치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26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 주민센터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투표를 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안 원장은 26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주민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투표한 뒤 “선거관리위원회가 (내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 몰라 조심스럽다. 선거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못 드린다”고 말했다. 자신의 말이 이제는 ‘정치인 안철수’의 발언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정치권은 이미 안 원장의 대권 도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한 야권 인사는 “안 원장이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도 많고, 안 원장 주변에는 이미 그의 대선행을 염두에 두고 모여든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안 원장이 ‘스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철수=대선, 박원순=서울시장 선거’로 역할을 분담했다는 얘기도 많다. 민주당 중진은 “야권에 한나라당 박 전 대표의 뚜렷한 대항마가 없는 상황도 그가 대권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했다.
일각에선 ‘안풍’이 여의도 정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만큼 안 원장이 기성 정당을 선택하는 대신 신당을 만들 것이란 관측도 돌고 있다. 이는 안 원장 스스로 기존 정치권을 대체할 새로운 리더십을 갖고 있다는 점을 거론해온 것과도 무관치 않다. 그는 지난달 6일 박 후보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할 때도 “(시민들이) 제게 보여준 기대는 우리 사회의 리더십에 대한 변화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물론 현실 정치의 벽이 안 원장을 가로막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지금까지는 바람으로 영향력을 키워왔지만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면 리더십이나 정책에 대한 혹독한 검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서울대 교수’란 직함을 달고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그에게는 벌써부터 ‘폴리페서’란 비판도 적잖이 나오고 있다.
안 원장이 야권의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굳히면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나 민주당 손학규 대표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문 이사장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박 후보를 위해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고 대중연설을 하며 중앙 정치무대에 데뷔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입지가 상승했다는 분석도 있다. 또 그가 야권 통합 추진기구인 ‘통합과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전개될 야권 통합 국면에서 목소리를 더 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정작 홈그라운드인 부산 동구청장 선거에서 패하면서 위상이 흔들리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적 상승일로를 달리던 그에게 처음 브레이크가 걸린 셈.
손 대표는 승리의 공을 나눠 갖게 됐지만 안 원장의 ‘힘’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대선주자로서의 입지가 약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자체 후보를 내지 못한 ‘불임정당’의 대표여서 ‘상처뿐인 영광’이란 평도 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