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판공방’ 개업 4주년… 납 활자로 책 만드는 박한수 대표
활자가 알알이 박힌 선반을 오가며 필요한 활자를 골라내고 있는 문선공 김찬중 씨. 활판공방은 수백만 자의 활자를 보유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문선공(文選工) 김찬중 씨(60)는 활자들이 알알이 박힌 선반을 분주히 오가며 필요한 활자를 골라냈다. 30년 경력. 눈을 감고도 어느 선반에 어느 글자가 놓여 있는지, 글자의 서체와 호수(號數)까지 맞춰 집어낼 수 있다.
문선공이 골라온 활자들로 판을 짜고, 이 조판(組版)을 활판 인쇄기에 올려 잉크로 찍어내면 책 한 장이 완성된다. 장인의 손길을 일일이 거치는 이 과정을 통해 활판공방의 스물여섯 번째 책인 ‘서정주 시선집’(12월 출간 예정)이 제작되고 있었다.
종이책을 넘어 전자책의 시대로 가고 있는 요즘, 스스로도 ‘채산성을 생각하면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박 대표가 납활자 인쇄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북 디자이너로 일하던 박 대표는 2000년대 초 서체 디자인에 대한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활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자연스레 활자를 만드는 기계와 장인, 활자 문화로 관심이 옮아갔다. “명색이 우리나라가 금속활자의 종주국인데, 컴퓨터 도입 후 납 활자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그리움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사명감으로 이어갔습니다.”
박 대표는 활판 주조기와 인쇄기, 교정기, 식자기 등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한번은 기계를 사기 위해 서울 동대문에 사는 여든 살 넘은 숙련공을 찾아갔다. 그 숙련공이 활자들과 인쇄기 앞에 막걸리를 따라 놓고 절을 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잘 들어보니 ‘저 사람에게 가서도 잘 돌아가고 사고 없길 바란다’는 말이었어요. 그분은 ‘이걸로 자식 공부를 다 시켰는데 이제 자식들은 내가 이 일을 하는 걸 부끄러워한다. 난 아들도 딸도 싫다. 이 기계들이 내 아들딸이니 제발 다시 살려달라’고 하셨죠.”
이렇게 기계들을 구입하고 숙련공을 모집해 2002년 서울 상수동의 자신이 운영하는 시월출판사 내에 활판인쇄소를 차렸다. 하지만 규모가 작아 제대로 책을 찍어낼 수 없었다. 2007년 활판공방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파주에 정착한 후에야 2008년 첫 시선집을 출간할 수 있었다. 오돌토돌한 요철감의 매력을 다시 맛보게 된 그날의 감격은 지금도 박 대표와 장인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담는 용기까지도 장인의 손길이 배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명품이 아닐까요? 그 가치를 알고 책을 찾아주는 사람이 4년간 하나둘 늘었다는 사실에서 작으나마 희망을 봅니다. 국가에서도 활판 장인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이 기술이 사라지지 않게끔 하면 좋겠습니다.”
*활판공방 연락처 031-955-0084~5
파주=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