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칫날 먹던 귀한 음식… 옛날엔 당면 안 들어가
지금은 만들기도 어렵지 않고 맛도 있어 흔하게 먹는 음식이 됐지만 잔칫날 먹는 음식이었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예전에는 귀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님도 즐겨 들었던 궁중요리였다.
그러다 보니 잡채를 잘 만들어 판서 벼슬에 오른 사람까지 있었다. 지금으로 바꿔 말하자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바쳐서 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그 주인공은 광해군 때 이충(李충)으로 벼슬이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던 인물이다.
사삼(沙蔘)은 더덕이며 각로는 재상에 해당하는 벼슬로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한효순(韓孝純)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이첨과 일당이 되어서 인목대비를 궁에 유폐시킨 장본인이다. 잡채 상서는 호조판서 이충을 가리키는 말이다. ‘광해군일기’에는 노래에 덧붙여 “한효순의 집에서는 사삼으로 강정을 만들었고, 이충은 채소에다 다른 맛을 가미했는데 그 맛이 희한하였다”고 적혀 있다.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서 사사로이 궁중에다 바치고는 했는데 임금은 식사 때마다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들여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고는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충은 광해군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는데 광해군 총애의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진기한 음식인 잡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잡채가 얼마나 맛이 좋았기에 출세의 발판이 됐을까 싶지만 이충이 만들었다는 잡채는 지금 우리가 먹는 당면 잡채와는 전혀 다른 요리였다.
광해군일기에 “채소에 다른 맛을 가미했다”고 했는데 잡채 맛을 좌우하는 비결이 소스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중기인 17세기 이명준은 ‘잠와유고(潛窩遺稿)’에서 잡채는 식초를 넣고 버무린다고 했기 때문이다.
구한말의 잡채에는 고기가 보인다. 고종 때 김기수가 ‘일동기유(日東記遊)’에 잡채를 묘사해 놓았는데 채소는 모두 잘게 썰어서 동물의 털처럼 가늘지만 낱낱이 서로 얼크러지지 않았으니 그 솜씨가 정교하다고 했다. 또 여러 생선과 고기를 넣고 콩을 섞어 그대로 익혔으니 맛이 담담해 술맛을 돕기에 알맞다고 했다.
본래 다양한 종류의 채소를 섞어서 먹는 잡채에 당면이 들어가면서 일반인들이 현재와 같은 잡채를 먹게 된 것은 1920년대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 당면은 화교들이 소규모로 만들어서 팔았기 때문에 널리 먹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그러다 1919년 황해도 사리원에 대규모 당면 생산 공장이 세워지면서 우리나라에 당면이 널리 보급됐다.
<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