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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영주 부석사

입력 | 2011-10-29 03:00:00

의상대사 향한 선묘의 사랑 경내 곳곳에




경북 영주 부석사는 국내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 특히 사찰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 번쯤 들러보았을 유명한 고찰이다. 상당수 답사기나 여행기의 목차 한쪽에는 부석사가 빠지지 않고 들어 있다. ‘부석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다면 사실 나도 선뜻 대답할 수가 없다. 모든 절집은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고, 그 매력은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새 또다시 부석사로 향하는 내 발길을 보면 이 절집의 매력이 상당함을 부인할 수 없어진다.

○ 당나라 여인의 이루지 못한 사랑


부석사의 이름에 들어있는 ‘부석(浮石)’은 글자 그대로 ‘뜬 돌’이다. 부석사 창건 설화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 가 만난 선묘란 아가씨의 짝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선묘는 의상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왕명을 받고 영주 봉황산 자락에 절을 지으려 한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때 수호신으로 의상을 따르던 선묘가 바위를 공중에 들어 올려 겁을 주어 그들을 굴복시킨다. 그제야 비로소 의상은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

오늘날 무량수전 옆에 있는 돌이 선묘가 들어올렸던 바로 그 돌이라고 한다. 절에 관련된 설화는 많지만, 부석사처럼 그 증거물(?)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곳은 드물다. 아마도 선묘의 바위가 있는 한 부석사는 영원히 아무 걱정도 없을 것만 같다.

○ 무량수전 아래에 깃든 석룡


이번 스케치 여행은 가족과 함께했다. 네 살짜리 딸아이도 동행했다. 부석과 무량수전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아이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나이라 안타까웠다.

무량수전 기둥을 만져보던 아이가 말한다. “나무! 나무!”

범종루에서 안양루 쪽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래, 부석 옆 벚나무도 나무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도 나무지. 나는 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가르치려고만 들었던 것일까. 있는 그대로를 느껴보자. 풍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보자. 오히려 아이에게 또 하나를 배운다.

내가 부석사 절경 중 하나인 범종루 아래서 스케치를 하는 동안 아이는 내 주변을 서성였다. “지루하면 엄마한테 가 있을래?” 아이가 쪼르르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아이가 사라진 범종루 계단 위로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600년이 넘은 목조건물(현재의 무량수전은 공민왕 7년(1358년)에 불타버린 것을 우왕 2년(1376년)에 다시 지은 것임. 안양루는 조선 후기 건물임). 여전히 창연한 빛깔과 부드러운 선이 봉황산에 겹쳐 있었다. 다시 스케치를 하다 보니 아이가 어느새 돌아와 계단에 앉아 있었다. 나는 여기저기 움직이는 아이의 모습을 종이에 담았다. 선묘도 지금 부석사 어딘가를 우리 아이처럼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을까.

전설에 따르면 선묘는 석룡(石龍)으로 변해 무량수전 아래로 들어갔다고 한다. 실제로 어느 학술조사단이 부석사 아래에 기다란 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선묘는 수백 년이 지나서도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문득 우리 아이가 부석사의 전설을 이해할 정도로 자라는 날, 아니 아이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날, 그리고 아이가 엄마가 되었을 때도 다시 함께 부석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흘러 나와 아이의 모습은 변해갈지라도 수백 년 무량수전은 변함없이 그대로이겠지. 그렇게 인생의 한 계단 한 계단에서 이곳을 찾다 보면 나도, 아이도 언젠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극락정토의 세상, 무량수전에 오르는 계단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깨달을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사물의 요철(凹凸)은 환하게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 아래서가 아니라 그림자에 굴곡이 생기는 아침저녁 햇살 속에서 보라고 했다. 범종루 기둥에 맺힌 빛은 부석사 곳곳에 낮엔 없었던 새로운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석등에 새겨진 연꽃 향기가 음영을 타고 가람 안을 진동한다. 아이는 연신 마당과 계단을 오가며 분주하다. 사뿐 발걸음을 움직이는 아이의 그림자는 의상을 따르는 선묘인 듯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이 가지런하다.

그래, 다음부터 누가 ‘부석사가 왜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다면 지금 이 순간의 풍경을 이야기해줘야겠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