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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人]피아니스트 손열음 "연주여행때 '길위의 독서' 짜릿…"

입력 | 2011-10-29 03:00:00

"음악이 문학을 만났을때 찌릿"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지음·이윤기 옮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지음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손열음 씨의 추천 도서

-장미의 이름

중세의 한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추리소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현대의 기호학 이론이 조화를 이루며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을 모티브로 못생긴 여자와 그녀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20대 성장소설. 》
떠돌아다닌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21세기에도 음악가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중세의 음유시인처럼 연주자에게 여행은 숙명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25·사진)도 11세 때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차이콥스키 청소년 콩쿠르에 혼자 여행가방을 끌고 참가했다. 2006년부터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 유학 중인 그는 지금도 세계를 돌며 연주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멀고 먼 여행기간에 곁을 지켜준 친구는 책이었다.

“제게 ‘진짜 여행’은 독서입니다. 연주여행을 하도 많이 하니까 제게 여행이란 ‘일’처럼 다가오기 마련이죠.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도 무덤덤하게 몸만 이곳저곳 다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책을 읽으면 그게 더 진실한 여행처럼 느껴집니다.”

손 씨가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곳도 교통수단 속이다. 연주여행 지역이 유럽일 때는 기차, 미국에서는 비행기, 한국에서는 주로 자동차라는 점이 다르지만 ‘길 위의 독서’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여섯 살 때부터 고향인 강원 원주에서 매주 서울로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다닐 때마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늘 책을 읽었다. 평소에는 종이책을 선호하지만 여행할 때는 무게 때문에 아이패드를 활용한다. 그의 아이패드에는 인터파크의 애플리케이션 ‘비스킷’에서 내려받은 전자책과 웹사이트 인터내셔널뮤직라이브러리에서 다운로드한 악보가 가득하다.

○ 영재를 넘어서

대부분의 음악 천재들은 스무 살이 고비다. 새로운 영재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도 사라지고, 자신만의 고독과 마주하며 스스로 원숙한 대가로 자라나야 한다. 이런 정신적 압력 때문에 대부분의 신동들이 10대를 지나면서 사라져간다. 그러나 음악영재 출신인 손 씨는 20대 중반을 넘기면서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그는 올해 초 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를 차지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대진 교수는 “열음 씨를 20년 가까이 봐왔는데, 최근 2년간 굉장한 발전을 이룬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누구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내면적 성찰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는 연주자이기 때문에 30대 이후가 더 기대된다”고 말했다.

손 씨는 독주회를 할 때마다 프로그램 곡 해설을 직접 쓰는 학구적인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다. 신문에 칼럼도 곧잘 게재한다. 그처럼 음악적 재능과 글재주를 동시에 갖춘 연주자는 보기 드물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는 한국의 20세기 근대 문학가들입니다. 20세기 초는 전쟁과 빈곤, 삶과 죽음의 이슈가 부각되는 시대라 예술작품이 남다른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마르셀 마이어, 알프레드 코르토도 20세기 초 연주자들입니다.” 그는 “빈곤한 상황에서도 풍자와 해학이 번뜩이는 게 한국근대문학의 장점”이라고 했다. “김유정, 채만식의 단편집은 거의 다 읽어 봤어요. 이효석의 생가에 갔을 때 단편집 두 권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는 독일에 있을 때는 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듣지는 않는다. 음악을 틀어놓으면 머리가 음악을 따라가 책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한다.

“독일 문학은 음악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어요. 음악을 알려면 문학을 알아야 하죠. 예를 들면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는 니체를 모델로 한 작품인데, 베토벤의 교향곡 등 고전음악과 관련된 내용이 많아요. 일반인들이 음악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죠. 반대로 음악을 알아야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도 합니다.”

○ 미술, 문학을 넘나드는 고전 읽기

손 씨는 책을 읽으면서 연관된 책을 찾아 읽는 ‘T자형 독서’를 즐긴다. 대표적인 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통한 서양철학 읽기였다.

“‘장미의 이름’은 형식상으로는 서스펜스 추리소설을 표방하지만, 고전철학을 총망라한 책입니다. 인간과 종교에 대한 고찰도 담겨 있죠. 이 책을 따라가면서 책 속에 언급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부터 현대의 기호학까지 서양철학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장미의 이름’은 제가 서양고전 철학을 공부하도록 한 강렬한 자극이자 가이드였습니다.”

손 씨는 “한 번도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책을 고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고전문학을 선호한다. 고전문학은 미술과 음악 등 다른 예술작품으로 수많은 영감을 주고받아 왔다는 점 때문이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이런 의미로 손 씨가 추천하는 작품이다.

“1899년 프랑스 작곡가 라벨이 작곡한 같은 이름의 곡을 키워드로 한 작품이에요. 느린 2박자의 아름답고 섬세한 무곡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라벨이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보고 지은 곡입니다. 그림과 음악, 문학이 시공간을 초월해 예술작품으로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받은 거죠.”

손 씨는 “피아노를 치는 것은 연설과 같다. 연설이란 말을 하되, 그저 말만 많아선 안 되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며 “그러면서도 무언의 대화처럼, 관객과 교감하고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책을 읽고,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한다고 해서 음악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예능(藝能)은 무엇보다 표현해내는 ‘기술적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표현력의 기초를 갖춘 사람들이라면 다릅니다. 작품의 인문학적 배경을 알고 연주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