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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사나이들 안나푸르나에 잠들다]박영석, 그에게 山은 무엇이었기에…

입력 | 2011-10-31 03:00:00

세계 첫 산악그랜드슬램 달성하고도… “나는 쉴 수 없다”




“편히 쉬소서” 안나푸르나 남벽 코리안 루트 개척 중 실종된 박영석 대장, 신동민 강기석 대원의 위령제가 30일 베이스캠프(4200m)에서 열렸다. 박 대장의 아들 박성우 씨(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등 유가족과 실종자 수색대원들이 제단 앞에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KBS스페셜 제공

“그대 더 높은 눈으로, 더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기 위해 함께 왔던 악우(岳友), 남원우 안진섭 여기 히말라야의 하늘에 영혼으로 남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로 가는 길 언덕엔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새긴 비석이 서 있다. 그가 1993년 5월 16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다 후배 두 명을 잃고 세운 비석이다. 그는 2007년 같은 장소에 도전했다가 오희준 이현조 대원 두 명을 더 잃었다. 공교롭게도 똑같은 5월 16일 사고를 당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2009년 마침내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올라 4명의 사진을 꺼낸 뒤 “고맙다”며 울었다.

2005년 최초로 지구상의 3극점인 에베레스트, 남극, 북극과 히말라야 8000m급 14좌,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그였지만 대기록을 세운 뒤에도 마음의 빚이 있었다. 후배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베레스트 남서벽이었다. 다리 근육이 파열된 채로 올랐다. 새 길을 뚫었다. ‘코리안 루트’라 이름을 붙였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모두 코리안 루트를 내려 했다. 그의 남은 인생 최대 프로젝트였다. 극한지역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한국인의 도전정신을 영원히 기록하는 것이 목표였다.

○ 기록과 업적

네 살 때 아버지와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 생애 첫 ‘완등’이었다. 재수 끝에 산악부로 유명한 동국대에 입학했다. 1993년 아시아 최초 무산소 에베레스트 등정을 했다. 8년 2개월에 걸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정의 서곡이었다. 1997∼1998년 1년 동안 8000m급 6좌에 올랐다. 1년간 최다 8000m급 등정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2001년 악명 높은 K2(8611m)를 끝으로 8000m급 14좌에 모두 올랐다. 2002년 남극의 빈슨 매시프(5140m)에 올라 7대륙 최고봉에도 모두 올랐다. 2004년 남극, 2005년 북극에 갔다. 산악 그랜드슬램이었다.

○ 부상과 오뚝이

박영석은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100m를 굴러 얼굴뼈가 보일 정도로 다쳤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꿰맸다. 1996년 에베레스트 북동릉에서는 눈사태에 휩쓸렸다. 700m를 추락했다.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함께 간 셰르파는 목숨을 잃었다. 부러진 뼈를 스스로 맞추고 돌아온 적도 있다.

○ 동료들의 희생과 방황

그의 길에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늘 후배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고집도 셌지만 맏형 같았다. 2007년 두 명의 대원을 잃었을 때 은퇴를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전셋집에서 몇 년간 같이 살던 사이였다. 삭발한 뒤 매일 술을 마셨고 방황했다. 환청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나는 쉴 수가 없다”고 말했다. “걔네들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했다.

○ 산으로 간 이유

대답은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였다. 한편으로는 한민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산에 가서 가장 지독한 근성을 보이는 것은 언제나 한국 산악대였다며 “대단한 민족, 악바리 민족”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한민족의 근성을 떨쳐 보이고 싶어했다. 전 세계에 코리안 루트를 내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의 슬로건은 “땅덩어리가 좁으면 생각의 크기로 맞서라”였다.

○ 성공에 대한 부담과 식객(食客) 박영석

그는 “가장 두려운 건 나 자신”이라고 했다. 등반대장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각종 후원을 받은 원정대는 성공에 대한 부담도 컸다. 아웃도어 활동가로 그와 가깝게 지내온 송철웅 씨는 “칼을 뽑기보다 칼집에 칼을 넣기 어려웠다는 말을 자주했다”며 박 대장의 고민을 떠올렸다. 욕심 부리면 모두 위험해진다. 박 대장은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산에서의 생활을 위해 요리의 달인이 됐다. 특히 회를 잘 떴다. 산악인 치고는 수영과 낚시, 작살 등 물질이 수준급이었다.

○ 경제문제와 가족생활

등반 때문에 신혼예물을 팔기도 했다. 결혼 8년 만에 첫 월급을 가져다줬다고 했다. 부인이 한때 닭칼국수 식당을 운영했다. 전세금을 빼서 나선 적도 많다. 원정대의 짐이 규정 무게를 초과해 별도의 요금을 내야 했을 때 “나는 학생이다. 돈이 없다”며 몇 시간을 버텨 통과하기도 했다. 애창곡은 ‘바보처럼 살았군요’였다. 이제 그 노래를 더 들을 수 없다. 2남 중 큰아들은 세미 프로골퍼다.

한편 대한산악연맹은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에 대한 국내 위령제가 11월 1일부터 사흘간 서울대병원에서 산악인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