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소-피리 불다 데뷔애절하고 토착적 창법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윤도현, 강산에, 정태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안치환 같은 패기 있고 쟁쟁한, 그리고 널리 알려진 젊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오직 임동창의 솔로 피아노만을 동반해 무대에 오른 그 가객은 휑하니 비어 보이는 너른 무대를 한순간에 장악해 버렸다. 충남 광천 지방의 상엿소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무려 12분에 이르는 ‘하늘 가는 길’이 끝났을 때 대강당은 바늘 하나가 떨어져도 들릴 만한 정적으로 휩싸였다. 그리고 2, 3초쯤 흘렀을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이 지붕을 흔들었다. 그것은 의례적인 환호와는 질이 다른 것이었다. 낯설기 그지없는 이 중년의 소리꾼에 대한 열광은 음악 그 자체에 대한 진정한 경의였고 세 번째 노래 ‘찔레꽃’이 끝났을 때 수천 관객들의 뇌리엔 장사익이라는 이름이 또렷이 새겨지고 있었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범한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권유로 음반을 취입했던 1995년 2월,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열악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그의 데뷔 앨범은 댄스뮤직이 지배하던 주류 대중음악에 밀려 음반 가게에서 곧 사라질 운명에 봉착했다. 어떤 기자도 평론가도 방송국의 프로듀서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봉건시대의 초연한 가객처럼 무심한 세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노래의 힘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린다.
데뷔 앨범의 ‘찔레꽃’부터 2008년 6집의 ‘귀천’과 ‘장돌뱅이’까지 그의 노래를 어떤 식으로든지 접한 사람이라면 먼저 그 도도하게 흐르는 강 같은, 그리고 그 강가에 늘어선 애절한 복사꽃 같은 보컬에 단숨에 매료된다. 그의 목소리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봉건시대 장터 가객의 혼이 깃들어 있다. 하나하나의 음과 낱말을 포착하는 기백은 어떤 탁월한 록 보컬리스트도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이며 음표 사이를 절묘하게 떠다니는 표현력은 장르를 넘어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는 성질의 것이다.
장사익의 또 하나의 장기는 앨범마다 ‘님은 먼 곳에’와 ‘동백 아가씨’부터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리고 식민지 시대 안기영의 창작 민요 ‘그리운 강남’으로 이어지는 독창적인 ‘다시 부르기’이다. 모든 외래 사조들이 그의 목소리를 통과하는 순간 토착의 서정으로 변모한다.
장사익의 노래는 자신의 음악적 근원인 전통 민요와 근대 이후 대중음악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동아일보DB
장사익의 노래들은 세기말과 세기 초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에게 하나의 위대한 위안이었다. 우리가 왼쪽 손에 정태춘의 1990년 작 ‘아, 대한민국…’을 얻었다면 오른손에 장사익을 얻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