떫은 도토리, 조상들 지혜 덕에 황홀한 변신
도토리묵 무침.
도토리를 갈아서 그냥 찌거나 삶아 먹으면 단지 굶주림을 면하려는 구황음식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시대 홍만선은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도토리의 껍질을 제거하고 삶으면 속이 꽉 차고 실해서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굶지 않기 위해 먹는 열매로 묘사해 놓았다.
그런데 묵을 만들어 먹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보통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식품을 두부라고 하는데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도토리묵을 도토리로 만든 두부라고 표현했다.
도토리는 묵 외에도 다양하게 요리해 먹었다. 도토리가루를 멥쌀가루, 느티나무 잎과 섞어서 떡으로 만들면 시골에서 먹기에 좋은 음식이 된다고 했다. 곡식가루와 섞으면 죽으로 먹을 수 있고, 밥으로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누룩과 섞으면 술도 담글 수 있으며 도토리 막걸리가 된다.
도토리로 된장도 만들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도토리를 따서 콩과 함께 반죽해 주먹만 한 크기로 둥글게 뭉친 후 솔잎이나 볏짚을 깔아 따뜻한 곳에서 메주처럼 며칠을 띄운다고 했다. 이 도토리로 장을 담그는데 장맛이 특히 좋다고 하면서 평안북도 강계(江界)의 도토리 된장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옛날 사람들은 도토리를 약으로도 썼던 모양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설사와 이질을 낫게 하고 위와 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먹으면 몸에 살이 오른다고 했으니 도토리묵을 비롯한 도토리 음식을 건강에도 좋은 별식으로 취급했다. 이규경은 도토리 껍질을 물고 있으면 치통마저 사라진다고 했다.
이런 도토리였으니 옛날에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먹었던 양식 대용품만은 아니었다. 도토리가 양식이 부족할 때 큰 보탬이 됐던 때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같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도토리가 훌륭한 식량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산골짜기 마을에서는 겨울에 도토리 수십 가마만 저장해 놓아도 부잣집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도 가을산행을 하면서 도토리묵을 만든다고 도토리를 줍는 경우가 있다. 떨어진 도토리만큼은 이제 다람쥐의 겨우살이 먹이로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
<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