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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는 지구인]⑧ 스티브 얼라드 “너무 빠른 변화는 문제”

입력 | 2011-11-01 12:19:00

●디자이너이자 교육자인 스티브 얼라드의 '서울사랑'
●"세대 간 차이를 인정하는 차원의 서울 디자인 고려해야"




산업디자인 컨설팅과 교육을 통해 한국에 정착한 스티브 얼라드(44). 그는 한국의 디자인 경쟁력이 세계적 수준임에 도달했지만 지나치게 첨단을 좇는 행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녹번은 마치 스위스 같이 근사합니다. 강남은 지나치게 심심하고 재미가 없었거든요. 저는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좋습니다. 최근만 7차례 이상 북한산에 올랐어요. 산악회에도 두개나 가입했을 정도에요."

스티브 얼라드(Steve allard·44) 교수는 이미 4년 넘게 서울에 거주중인 미국인이다. 올해 초 그는 북한산이 가까운 지하철 3호선 녹번역의 한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겼다. 어린 시절부터 '마운틴 뷰(mountain view)'를 좋아했다는 그는 맘껏 등산을 즐길 수 있는 북한산 주변의 지형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인근 은평구 응암지구 재건축 시위가 지속되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봤습니다. 공격적인 건설사가 움직이자 대표적 서민 거주지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서울의 고민이 바로 거기 있는 것 같았습니다."

■ 미네소타 태생의 성공한 실리콘밸리 디자이너

거친 '아웃도어' 삶을 사랑하는 미국 미네소타 태생인 미국인 디자이너의 이력은 화려하고 도전적이었다. 일찍부터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재능을 보인 그는 1990년대 미국 전역을 오가며 생활용품은 물론 자전거 스킨스쿠버 등의 스포츠 용품 디자인 나아가 실리콘 밸리에서 슈퍼컴퓨터 디자인에 이르는 전 방위적인 디자이너이로 활약해왔다.

제품의 설계와 생산에 관여해야 하는 산업디자인의 특성상 아시아에 대한 관심도 빨랐다. 1994년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2000년대에는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디자이너의 도전을 계속해갔다.

그러던 2004년 실리콘밸리에서 삼성전자의 디자인 컨설팅과 연계되면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 과정에서 천생연분을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미국에서 한국 일을 하게 되니 언어장벽을 뛰어 넘어야 했고 자연스레 한국인 커뮤니케이터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그렇게 일하면서 자연스레 그 분과 결혼하게 됐습니다. 한국의 품에 안겨 정착해 버린 거예요. 하하"

그는 한국에서 자신의 디자인컨설팅 사업은 물론 대학 강의(명지대와 서울과학기술대) 그리고 한국에 대한 칼럼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디자인 컨설턴트답게 그의 관심은 한국의 디자인에 대한 전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는 “한국을 떠나고 싶은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대목”이라고 충고한다. 그 해답으로 전통에 대한 존경의 문화를 꼽았다


-한국에 온 이유가 결혼 때문만은 아니었을 텐데…

"물론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디자인 강의를 하면서 많은 한국학생들을 접했다. 언어장벽을 빼고는 가장 높은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싱가포르와 중국을 미리 경험한 것도 아시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모두가 중국의 부상을 얘기하지만 아직은 미흡하다고 느꼈다. 한국이 훨씬 더 살기에 편안했고 역동적이라 판단했다."

■ 산업디자인의 수준이 국가 흥망의 바로미터

-미국의 디자인은 여전히 훌륭하다. 애플의 경우처럼…

"사실 이미 5년 전부터 미국의 산업디자인은 몰락하고 있다. 경제와 디자인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일본이나 미국의 디자인이 예전과 같이 못한 이유다. 미국 디자이너의 클라이언트가 압도적으로 아시아 업체들이다. 한국의 기아 자동차가 대표적 아닌가. 불과 몇 년 사이에 누구나 '기아차'의 디자인을 얘기한다. 심지어 이들 디자인을 베낄 정도가 됐다."

-사실 10년 전엔 누구나 일본 디자인을 얘기했었다

"물론이다. 예전의 소니 디자인에 압도적으로 열광했고 영감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 한 국가의 현재를 보는 가장 확실한 잣대라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한국이 세계무대에 전면 등장하는 시대다."

-한국은 디자인 전공자가 지나치게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

"한국에서만 한 해에 2만 명이 넘는 디자이너가 배출된다고 들었다. 교육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엿보였다. 일단 한국 학생들은 교수들과 대화가 힘들 정도로 수줍어한다. 또한 디자이너 양성 과정도 서구와는 크게 다른데, 내가 배울 때는 산업디자인이라면 거의 모든 디자인이 가능하게 교육받았다. 일례로 자동차에서부터 핸드폰까지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지나치게 세분화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최근 한국 산 제품 가운데 인상적인 작품 몇 가지만 언급한다면….

"글쎄 너무 많은데…일단 '래미안'을 꼽고 싶다. 싱가포르의 공공주택에서도 오래 살아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한국의 아파트처럼 수납공간 편의시설 등이 잘 설계되고 디테일까지 살아있는 독창적 디자인은 찾지 못했다. 한 마디로 깜짝 놀랐다. 삼성과 LG의 휴대폰 역시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아이폰은 기본적으로 액정이 너무 작아 피곤하지만 한국산 휴대폰은 큰 화면을 갖고도 군더더기 없이 디자인 됐다."

-한국의 디자인이 앞서가는 분야는 어디인가?

"거의 모든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한국디자인이 존경받고 있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전 분야에서 글로벌 탑5안에 드는 것 같다. 자동차, 전자제품, 하우싱(인테리어) 관련 분야는 세계최고에 근접했다. 하지만 가구 분야는 여전히 조금 뒤쳐진 것 같다."

그는 한국에서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족하며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도로 운전’을 제외하고 말이다.


■ 역사도시 서울에 가해지는 '빨리빨리' 문화는 최악

그는 싱가포르 정부의 의뢰를 받아 도시디자인 컨설팅을 했을 정도로 도시 문제에도 상당한 식견을 지닌 전문가이다. 그는 한국에 온 이후 지면칼럼을 통해 "서울의 빨리빨리 문화가 서울을 망친다"는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최근 급변하는 서울을 유심히 지켜보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외국인 전문가 가운데 하나다.

-디자인적 관점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서울의 고민 지점은 어디인가?

"일단 한국인과 서양인이 바라보는 도시 디자인의 관점과 목표가 다른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인가?

"동양인들은 하모니(조화)를 디자인의 최고 목표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서양인은 콘트라스트(대비)를 더 높게 본다. 무척 비슷하면서도 다른 표현인데…우선, 똑같은 유리건물들이 늘어선 풍경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서구인들이 바라보는 서울의 매력은 어느 지점인가?

"압도적으로 전통과 현대의 대비이자 조화다. 나 역시 처음 한국에 당도했을 때 그 강렬한 대비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올드(Old)'와 '뉴(New)'가 공존한 서울은 전에 볼 수 없던 도시였다. 광화문 너머 500년 전의 경복궁과 여의도의 첨단 증권거래소 빌딩의 상반된 이미지가 내 머리 속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이 장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서울은 마치 자신의 장점을 억지로 버리려는 도시처럼 비친다. 어디가나 똑같은 유리가 뒤 덮인 빌딩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 삼청동을 봐라. 1940년대 지어진 건물에서부터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거의 모든 시대의 현대 건축물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 너무도 신기한 광경이다. 마치 화석단층을 보듯이 그 시대의 특징과 양식을 지닌 건축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런 장점을 지나치게 빠르게 없애고 싶어 한다."

스티브 얼라드 교수는 “삼청동과 같이 전통과 현대가 공존한 지역이 외국인들이 느끼는 서울의 진짜 모습이다”고 말한다. 그는 억지스러운 조화를 추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사진은 삼청동 한옥마을. 동아일보 DB


■ 강북 시스템의 매력을 인지해야…북한에 디자인 전파하고 싶어

-아무래도 한국은 변화에 대한 갈망이 높아졌는데….

"변화는 좋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는 곤란하다.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정력적인 것이 문제다. 첨단과 트렌드가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니다. 노스탤지어(향수)를 즐기는 여유도 필요하다. 특히 과거의 가치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 줄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게다가 건설회사의 로비는 언제나 성공하는 것처럼 비친다. 모든 게 금세 사라진다."

-미국인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으니 좀 어색하다.

"글쎄. 나는 한국의 21살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들은 언제나 한국을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잘은 몰라도 한국의 고유한 가치에 대해 스스로 성숙시킬 여유를 갖지 못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도시 디자인적으로 접근해 보면 건축의 트렌드가 바뀌듯 10년마다 세대 간 간극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존재를 더 드러내야 한다.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 건물로 대체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옛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게 하는 사회 분위기도 필요하다."

-디자이너의 생각 치고는 파격적인데….

"디자인은 원래 사람을 위한 활동의 총체다. 산업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 가운데 하나는 70살 이상의 노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조사하고 그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과정이 빠져 있어 보인다. 선배 세대에 대한 고려가 없이 첨단만 뒤쫓는 모양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부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스티브 얼라드.


-서울에서 가장 힘겨운 경험은?

"압도적으로 '운전'이 가장 힘들었다. 서울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의 운전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공격적으로 변하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물론 서울보다 험한 도시도 많다. 어찌됐건 나는 서울에서 운전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그러고서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국에 살면서 장기적인 목표가 있다면…

"디자이너란 디자인이 부족한 곳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 디자인으로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고 싶다. 한국에 와서 보니 오히려 통일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더라. 나는 북한으로부터 초청받는 게 목표다. 평양의 대학에서 디자인 강의를 해보는 것이 꿈이다. 그쪽은 내가 필요할지 모른다. 기꺼이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