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88년 11월 ‘10·27법난진상규명추진위원회’ 대표인 송월주 스님이 기자회견을 통해 법난을 철저하게 규명해 줄 것을 정부 당국에 촉구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오전 10시경, 지프차는 보기에도 음습한 건물로 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악명 높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었다. 가사 장삼을 벗고 내의 위에 푸른색 미결수복을 입었다. 보안사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라 걱정은 됐지만 떳떳하기에 잠깐 조사받고 나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조사는 장장 23일이나 이어졌다. 인적사항 확인과 종단 분규가 왜 일어났냐는,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 4, 5명이 수사를 맡았는데 그중 장모, 김모라는 2명이 주로 물었다. 5일이 지나자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종로경찰서와 성북경찰서, 전북 김제 등 내 흔적이 있는 곳에서 올라온 정보를 캐물었다. 인적사항과 재산, 지역 여론, 사상까지 질문은 다양했다.
“여기, 스님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여럿 왔어요.” “스님, 이 방에서 김종필 김재규 정승화가 조사 받았어요. 옆방에는 이후락이 있었고….”
자랑인지, 위협인지, 이런 말들이었다. 대부분 스님이라는 호칭을 썼지만 한두 사람은 ‘자네’라며 말을 놓기도 했다. 이들은 총무원장을 사퇴하고 그 업무를 후임자에게 넘기라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종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강제 연행된 뒤 13일째인 11월 8일, 가사 장삼을 내줬다. 총무원에 도착하자 개운사 주지와 총무원장 직을 사퇴하고 모든 권한을 후임자 탄성 스님에게 넘긴다는 서류가 준비돼 있었다. 보안사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장을 찍었다. 탄성 스님은 한 스승(금오 스님) 아래서 공부한 사형(師兄)이다. 사형은 “인연이 이렇게 돼 일을 맡게 됐다”고만 했다. 피차 두말이 필요 없었다.
벼룩도 낯짝이 있던지 보안사 직원들이 짧게 인사할 기회를 줬다. 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종단을 잘 지키라”고 했다. 스님과 종무원, 불자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건강 지키시라’고 했다.
모든 것이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신군부의 합동수사단은 10·27 법난 이전부터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종단 지도부를 와해하려 했다. 법난 다음 날인 28일 합수단 실무대책반장인 전창열 중령과 몇몇 스님이 만났고, 11월 5일에는 정화중흥회의가 마비된 종단 업무를 대신한다고 나섰다.
강압에 의해 모든 권한을 넘겼지만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상부에서 아직 나가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은사께 받은 ‘이 뭣꼬’라는 화두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23일째인 11월 18일 조사 내용을 발설하지 않고, 향후 2년간 모든 공직을 맡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다.
신군부의 이른바 불교정화 작전명은 ‘45계획’이었다. 조계사 주소인 서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를 딴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 따라 27일 조계종 스님과 불교계 인사 153명이 연행됐고, 사흘 뒤인 30일에는 군경 합동 병력 3만2000여 명이 전국 사찰 및 암자 등 5700여 곳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그해 4월 26일 총무원장에 취임한 뒤 자주 개혁을 앞세운 조계종의 봄은 6개월여 만에 어이없이 그렇게 끝났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