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70년대 30대 중반의 송월주 스님. 1980년 4월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한 스님은 5·18 민주화운동이 터지자 6월 중앙 종단 대표로는 최초로 광주로 향한다. 송월주스님제공
1980년 4월 총무원장에 당선된 뒤 인사하러 온 문화공보부 고위관리가 제 딴에 치켜세워 준다며 내뱉은 말이다. 그러나 나의 종단 대표 등록은 내부 소송 등을 이유로 계속 반려됐다. 여러 곳에 공을 들였지만 허사였다. ‘송월주는 반골(反骨)이다. 그래서 위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평가만 확인했다.
악연(惡緣)도 인연이다. 오히려 좋은 인연보다 모질고 질겨 끊기도, 잊기도 힘들다. 문공부 관리에 이어 종단을 출입하던 보안사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총무원장 송월주’ 이름으로 ‘구국 영웅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합니다’라는 성명을 내라고 부탁했다. 각계에서 이런 지지성명이 쏟아질 때였다. 그것이 시류였고 시대를 살아가는 처세였다. 노골적으로 싫다고 할 수 없어 “정교(政敎) 분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랬더니 다시 찾아와 내 이름을 뺀 총무원 명의는 어떠냐고 했고, 다시 1999년 총무원장이 된 사회부장 정대 스님을 통해 또 요구해왔다. 그래도 자주 개혁을 표방하는 제17대 총무원의 이름을 팔 수는 없었다.
광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종단 직할의 본, 말사 주지와 신행단체 등에서 100여 명이 참여해 성금을 모았다. 5월 24일 선발대 격으로 ‘소요사태 진상조사 선무단’을 보냈다.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조계사를 관할하던 종로경찰서장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위에서 못 가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안 가는 게 좋습니다.”
나의 입장은 달라질 게 없었다.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시민 쪽 희생자와 군인 등 모두를 위로하기 위해서 가겠다.”
당시 실력자로 부상한 이철희, 장영자 씨 부부와의 ‘용두관음’에 얽힌 사연도 있다. 나를 전두환 장군에 비유한 그 관리가 9월경 방문했다.
“장영자 씨가 모시고 있는 용두관음 불상이 있는데, 그 불상을 모시고 여의도광장에서 스님 수천 명과 신도 100만 명이 모이는 호국기도회를 했으면 합니다. 이철희 씨가 대회위원장을 맡고, 경비 5억 원은 그쪽에서 부담합니다. 아마 대표 등록 문제도 풀릴 겁니다.”
말이 호국기도회지 전두환 장군을 위한 이, 장 부부의 충성극이 뻔했다. 그래서 “이철희는 신도회장도 아니고, 대회를 한다면 최재구 신도회장이나 내가 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법난 직전 총무원을 찾은 이환의 전 MBC 사장의 경고도 기억난다. 그는 “직원들을 광주에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취재를 시켜 사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됐다. 스님은 아직 (무사해) 다행이다”라며 걱정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법난이 터졌다.
1980년 외로운 광주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불교, 나아가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③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30여 명의 스님이 경기 남양주시 흥국사로 끌려간 ‘불교판 삼청교육대’를 비롯해 아직 끝나지 않은 법난의 상처를 얘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