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팅 디테일이 돋보이는 샤넬의 블랙 레더백(위)과 멀티스트라이프 패턴을 가방 속에 프린트된 자동차에 적용한 폴스미스의 ‘미니 온 로케이션’백. 샤넬, 폴스미스 제공
하지만 그들에게는 깊숙이 감추어진 또다른 내공의 ‘이름값’이 있다. 바로 그들이 만든 어떤 제품을 단 0.1초 만에, 한눈에 그 디자이너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시그너처’다. 옷 안의 라벨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아니 그 라벨을 간략히 표기한 브랜드 로고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디자이너만의 개성이자 독특한 감성이 ‘시그너처’이다.
예를 들어 샤넬은 검정 바탕에 흰색 고딕체로 쓴 샤넬이란 브랜드 라벨에서 샤넬(CHANEL)의 앞 글자 ‘C’만을 겹쳐 더블 C 모양의 로고를 만들었다. 이 심벌은 단추 구두 핸드백 등 여러 곳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굳이 로고를 보지 않고 샤넬의 대표적인 가죽 핸드백의 퀼팅 디테일만 봐도 누구든 샤넬임을 인지할 수 있다. 만약 다른 브랜드에서 이 디테일을 차용한다면 샤넬의 아류작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디자이너 폴스미스 또한 멋스럽게 휘어진 폴 스미스란 로고나 브랜드 라벨을 보지 않고도 다양한 색상이 조합된 멀티 스트라이프 패턴을 보면 브랜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티타임을 가지면서 우연히 이 멀티스트라이프 패턴의 탄생 배경에 대해 듣게 됐다.
여행을 좋아하고, 수집을 좋아하고,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그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오래된 천조각들을 모았는데, 그 실오라기를 한 가닥 두 가닥씩 뽑아 심심풀이 삼아 나무막대에 이리저리 감아보다 발견한 것이 바로 이 멀티스트라이프 패턴이라는 것이다.
평생 이런 시그너처 스타일을 찾아 헤매다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이들처럼 이 스타일을 대중과 공유하며 길이 남기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순수 예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 실크스크린,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마르셀 뒤샹의 오브제 아트…. 모두 흉내 낼 수 없는 창작물, 그들만의 시그너처다. 최근 삼성전자가 국내 대학원생에게서 받은 디자인을 해외 유명 디자이너의 것처럼 홍보한 것은 성명표시권 침해라는 판결이 나와 화제가 된 바 있다. 필자가 그 대학원생의 지도교수로서 몇 해 동안의 마음고생을 다 보았던 지라 감회가 남다른 사건이었다.
디자이너에게 있어 시그너처란 단순히 멋들어진 사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디자이너의 분신이자 생명이자, 그의 정신이 깃든 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