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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 펄 시스터즈 배인순 씨

입력 | 2011-11-04 03:00:00

앵글 속의 길 통해 또다른 인생길 가렵니다




호젓한 산길, 터벅터벅 혼자가는 길, 어렵더라도 묵묵히 걸어가는 내 인생의 길. 제주도, 2011. 배인순 촬영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를 풍미했던 여가수. 신중현과 함께 솔음악을 국내에 전파했고 오디오뿐만 아니라 비디오형 가수로, 일본 진출 1호로 한류의 원조가 될 뻔한 가수가 있다. 1969년 자매가 함께 부른 ‘커피 한잔’에서부터 ‘님아’ ‘떠나야 할 그 사람’ 등으로 당시 국민의 폭발적 사랑을 받았던 가수. 가끔 TV나 여성지에서 그 여가수에 대해 이런저런 소식이 들려왔지만 최근에는 뜸했다. 그러던 중 중년을 훌쩍 넘어선 그가 모 대학 사회교육원에서 사진을 배우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무슨 연유일까 싶어 서울 청담동의 한 커피숍에서 마주 앉았다. 당사자는 바로 자매가수 ‘펄 시스터즈’ 중 언니인 배인순 씨. 수십 번은 들었을 법한 곤혹스러운 질문에도 유연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에서 연륜이 묻어났다.》


펄 시스터즈 배인순 씨

사진과의 인연은 의외입니다.

“사진은 카메라 네모 안에 한 폭의 그림을 만드는 작업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찍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때는 내가 가수를 그만두면 카메라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이제야 사진을 취미로 갖게 되었네요.”

사진은 언제부터 해오셨나요.

“옛날에는 주로 찍히기만 했으니 본격적으로 사진을 한 것은 사회교육원에서 체계적으로 배우면서부터니까 작년부터라고 봐야죠. 완전 초짜라고 봐도 무방합니다.(웃음)”

주로 무슨 사진을 찍으러 다니셨나요.

“풍경이죠. 사진을 제일 처음 시작하면 대부분 풍경부터 하는 것 같아요. 찍기 편하고…. 대부분 풍경이 아름답잖아요. 같이 교육받는 분들과 명소를 찾아다니면서 국내외를 여행하면서 많이 찍었어요. 다닌 곳만 해도 흑산도, 소매물도, 청산도, 팔공산, 베이징 등 국내외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수백 장씩 사진을 찍었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사진을 찍으러 다닐 만한 시간이 나지 않네요.”

사진을 하게 된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31세가 된 막내아들 때문입니다. 사실은 막내가 언어구사력이 조금 떨어집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죠. 고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내가 신경을 쓸수록 아이는 더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제가 곁에 있으면 오히려 말이 더 어눌해졌거든요. 의사와 상담해보니 막내는 언어능력은 일반인에 못 미치는 대신 시각능력은 보통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해요. 의사가 아주 복잡하게 생긴 인형을 주면서 아이에게 그려보라고 했는데 막내는 일반인들보다 더 섬세하게 그 물건을 그려냈어요. 그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을 보면 자기가 본 어떤 물체와 비슷하다는 얘기를 자주했어요. 그만큼 시각적 인지 능력이 좋은 거죠. 그래서 언젠가 내가 사진을 배우면 막내에게 가르쳐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본인이 사진에 흥미가 있어야 할 텐데요.

“소질은 충분하다고 봐요. 초등학교 3학년 미술시간에 아이가 도화지를 백지로 낸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물어 보니까 양들이 풀을 다 뜯어 먹어 하얗게 된 것이라고 선생님께 설명하더래요. 물론 아이가 짓궂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저는 아이의 상상력에 놀랐어요. 실제로 본인이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와 사진 찍기를 좋아해 잘 그리고 잘 찍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연못에서 노는 오리 사진을 찍은 적이 있어요. 구도도 수직, 수평이 잘 맞았고 작품처럼 손색이 없어 저도 놀랐어요. 그래서 아이의 단점을 고치려 애쓰는 것보다 장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요즘도 가끔 제 형이 사준 캐논 콤팩트 카메라로 산길, 꽃 등을 찍어 저한테 e메일로 보내와요. 막내의 뛰어난 시각 능력과 상상력이 합치면 좋은 카메라 감독이나 사진가가 될 수 있으리란 믿음이 생겨요. 그리고 그런 직업은 특별히 말이 필요 없는 직업이잖아요.”

지금 막내아들이 사진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주로 하는 일은 애견 미용 일이에요. 애견미용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데 워낙 동물을 좋아해요. 애아버지가 희귀한 양치기 개 암수를 구해주었어요. 그 개가 새끼를 낳으면 인터넷으로 분양하겠대요. 막내는 경기 안성시에서 동아방송예술대 이사장으로 있는 애 아빠와 같이 살고 있어요. 그 대학은 카메라 감독을 많이 배출하는 유명한 학교잖아요. 아이 아버지도 막내에게 특히 애정을 쏟는다는 얘길 들었어요. 이런 기회에 아이에게 그런 소질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이 아버지도 뭔가 조금은 신경 쓰지 않겠어요.”

자주 아드님을 보시나요.

“가끔 전화를 하거나 어쩌다 한 번 보는 정도입니다.”

그럼 어떻게 막내에게 사진을 가르쳐 줄 수 있나요.

“할 수 있는 거라곤 통화 할 때나 어쩌다 만났을 때 ‘카메라에 애정을 가지고 사진을 많이 찍어 보라’는 말만 해요. 아들과 같이 사진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현실이에요. 어떤 날은 꿈에서도 막내 걱정을 하다 잠을 깨요. 내가 병들어 죽기 전에 홀로 서기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이제 여자친구도 생겼다니까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요. 나쁜 사람의 꼬임에 빠지지 않고 잘살았으면 합니다. 막내 얘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나네요. 이러면 안 되는데….”(눈시울을 붉힌다)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다시 본인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거리의 휴식. 베이징 2011. 배인순 촬영

본인이 사진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사진의 기초가 약해요. 사실 저는 ‘기계치’라서 기계와 쉽게 가까워지지 못해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교육원에서 1년 정도 사진을 배웠는데 제 수준보다도 레벨이 높은 것 같아요. 지금 제게는 더욱 탄탄한 기초가 필요한 상태인 듯해요. 예술사진을 찍는 게 아니니 아마추어로서 별 어려움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정도까지만 가도 만족할 것 같습니다. 제가 사진 찍는 스타일도 유별나요. 사진을 자동모드로 찍는 게 싫어요. 자동으로 찍으면 왠지 내 힘으로 찍은 것 같지가 않아요. 비록 잘난 솜씨가 아닐지라도 수동으로 하나하나 맞추어가면서 사진을 찍어요. 그러다 보니 노출이 잘 안 맞는 사진이 많이 생겨요. 언젠가 멋진 사진을 찍었을 때 자동에 의존해 찍었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거든요. 사진을 찍은 다음 포토샵으로 보정하는 일도 만만치 않고요.”

카메라 장비는 무얼 쓰나요.

“주변의 추천으로 캐논 5D MarkⅡ를 샀어요. 사진의 품질에선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해요. 고화질로 찍으면 사진 사이즈가 크니까 나 같은 아마추어가 피사체를 좀 작게 찍어도 나중에 트리밍을 했을 때 품질에 문제가 없어 그런 부분이 맘에 들어요.”

개인적으로 어떤 사진을 많이 찍으시나요.

“길 사진을 오래도록 찍고 싶어요. 아무도 없는 길을 보면 그 길 저쪽에서 누가 올 것만 같아요. 길 사진은 길에 사람이 있는 모습과 없는 모습이 느낌이 너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사람이 있는 길도 좋긴 한데 너무나 평범한 느낌이에요. 반면에 사람이 없거나 보일락 말락한 아련한 길은 누군가가 말을 걸어 올 것 같은 느낌을 받잖아요. 저는 길 사진으로 ‘제 자신의 인생의 길’을 표현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길 사진을 찍기 위해 앞으로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고 그럴 기회가 있으리라 믿어요.”

사진 말고 앞으로의 인생 플랜이 있다면….

“저는 이전처럼 노래를 부르고 싶었어요. 하지만 생겨난 인연의 연결고리는 어쩔 수 없나 봐요. 과거사가 내겐 인생의 멍에 같거든요. 전 남편은 내가 무슨 활동을 하면 늘 자기랑 연관이 되니까 불편해하는 느낌이고 아이들도 제가 연예 활동하는 것이 못마땅한지 반대했어요. 그런 등등의 이유로 노래를 포기하고 또 포기하면서 10여 년을 지나온 거지요.”

그러면 앞으로도 노래는 안 하시나요.

“저는 제가 부정해도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있다고 생각해요. 결혼하면서 물거품이 되었지만 가수로서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1년간 노래 발성법, 모던 재즈발레 같은 것을 배운 적도 있었고요. 자식 때문에 미국에 있을 때는 골프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칠 수 있는 코치 자격증도 취득했어요. 지금도 그때처럼 어떤 일을 하면 열심히 할 자신도 있어요. 제 성격이 긍정적인 데다 몸 관리도 해서 건강도 괜찮아요. 대중가수를 하지 않더라도 제가 가진 ‘달란트’로 앞으로의 인생을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는 일거리는 가지고 싶어요.”

그런 게 뭐가 있을까요.

“현재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두 가지예요.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싶다는 것과 좀 더 신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에요. 복지원 설립은 경제적 여건상 당분간 미룰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신앙생활은 주변의 권유뿐 아니라 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라도 더욱 알차게 하고 싶어요. 집 근처의 교회에 다니며 권사가 된 지 몇 년 됐어요. 성가대 활동도 하는데 앞으로는 제 재능을 십분 살려서 젊은 친구들과 함께 가스펠송으로 하는 찬양이나 전도하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배 씨의 이혼은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후유증을 가져다 주었다. 그에 따른 고통과 시련은 상상 이상이다. 본인은 자신의 주변 얘기에 한사코 입을 다물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만으로도 그 슬픔이 짐작이 된다. 아이들을 더는 만날 수 없게 된 것부터 지인들에게 돈을 사기 당한 일, 어머니가 딸의 이혼 충격에 돌아가신 일 등 그에게 안겨준 인생의 쓴맛은 컸다.

하지만 이제 배 씨는 달라져 있었다.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운동으로 극복했다. 상대의 이야기를 곱씹어보기도 하며 일이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접을 줄도 알게 되었다. 역경이 그녀를 단련시켰다. ‘자식들을 위해 버팀목이 되고 작은 언덕이 되어서 넉넉한 아버지로 마음 편히 살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라며 전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제는 담담하다. 그렇다고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가수 일에서 완전히 마이크를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35년 만에 보컬 트레이닝까지 받고 있다. 본인의 말처럼 신앙생활을 염두에 둔 선택을 했다. 평범하지만 품위 있게 신앙인으로서 알찬 삶을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제는 그의 사진 취미와 더불어 신앙생활도 눈여겨볼 때다.

ku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