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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joy]석탄 나르던 검은 길, 들꽃천지 생명의 길로

입력 | 2011-11-04 03:00:00

정선 하늘길 걷기




강원 정선 하늘길에서 바라본 늦가을 백운산. 하이원골프장 너머 안개 사이로 나뭇잎이 노릇노릇 물들었다. 하늘길은 해발 1300m 높이에 자리 잡은 옛 석탄운반길. 한때 덤프트럭들이 이 길로 검은 석탄을 실어 날랐다. 백운산(1426m), 함백산(1573m) 일대엔 아직도 석탄운반길이 80km나 남아 있다. 정선=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나이 칠십이 되면 귀신이 돼간다

눈치코치, 모두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귀 닫고 눈도 아예 감는다

이 나이에 무얼 더 바라겠냐만

왜 이리도 가슴은 답답한가

구절양장(九折羊腸) 굽이굽이

길 따라 돌고 돌아가는 그곳을

나는 알아냈다

‘아리랑, 아리랑∼아라리오∼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갈 친구들은 이미 알아서 넘어갔다

정다운 이웃, 아리따운 여인들

죽마고우들

사랑하는 이, 모두 나를

헌신짝 차버리듯이 내차버렸다

이젠 좇아갈 기력도 험한 돌길도 힘겹기만 하다만

마지막 한 곳 꼭 보아야 할 곳이 어디에 있다기에

나는 멈칫거린다, 갈까 말까나

드디어 강원도 땅 무릉도원인가


정선 아라리에 묻어왔다

‘아리랑, 아리랑∼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내가 넘어간다∼’

덩실 춤을 추면서 숨을 몰아쉬면서

머무른 구름과 산새도 쉬어 넘는

산골에 왔다

세월의 애환을 싣고

강물은 느릿느릿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먼저 간 분들에게

나도 보았노라고

돌아가면 말하련다


-장윤우 ‘이제 살 만큼 살았고 볼 만큼 보았다’에서》


안개가 사방에서 피어오른다. 발이 푹∼푹∼ 안개 늪에 빠진다. 정신이 아득하다. 몸이 스멀스멀 젖는다. 알 수 없는 검은 유령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하늘길은 몽환적이다. 걷고 또 걸어도 ‘아라리∼ 아라리∼’ 뱅뱅 감아 돈다. 도무지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땅인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더듬더듬 발걸음을 뗀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허리춤을 꼭 부여잡고 주춤거린다.

하늘길은 강원 정선 영월 산마루에 있다. 백운산(1426m), 함백산(1573m) 일대 ‘석탄운반길(운탄길·運炭路)’이 바로 그 길이다. 산잔등, 산허리(해발 평균 960m)에 200리(80km)나 되는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트럭들은 한때 그 길로 검은 석탄을 실어 날랐다. 서울 사람들은 그것으로 구멍탄을 만들어 한겨울을 보냈다. 광원들은 그 연탄 위에 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검은 가래를 걸러냈다.

하루 2000여 t의 물이 샘솟는 한강의 시원 검룡소.

발 아래엔 안개의 나라

늦가을 하늘길은 ‘안개의 나라’이다. 툭하면 안개에 파묻혔다가, 바람이 건듯 불면 언뜻언뜻 얼굴을 드러낸다. 붉은 단풍잎이 물기에 젖어 더욱 말갛다. 길바닥에 수북이 쌓인 황금바늘잎이 푹신하다. 안개이불은 한순간에 문득 걷힌다. 발아래 산과 산들의 어깨주름이 첩첩하다. 새털 양떼구름이 아련하게 드높다.

만항재(1330m)에서 하이원골프장(1340m)에 이르는 하늘길(10km)은 표고차가 10m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길 중에서도 으뜸이다. 해발 1300m가 넘는다. 백운산 함백산 어깻죽지를 지르밟고 가는 구름길이다. 느릿느릿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이원 카지노, 하이원 콘도, 하이원 골프장을 끼고 빙 돌아간다. 새벽안개가 자욱할 때 걸어야 제맛이다.

하이원 카지노 골프장도 원래 광산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몇몇 기념물로 남겨둔 옛 탄광시설들을 빼놓곤 거의 흔적이 없다. 감쪽같다. 서울 난지도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것과 같다.

탄광촌 사람들은 1980년대 말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이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초등학교도 점점 아이들이 줄더니 지금은 아예 흔적 없이 사라진 곳도 있다. 남아 있는 곳도 아이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석탄은 수십억 년 전 나무와 풀 그리고 동물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캐내 연료로 썼고, 바닥이 나자 하나둘 떠났다. 그러나 나무와 풀은 그곳에 뿌리를 박고 다시 생명의 씨앗을 뿌렸다. 사람들도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운탄길은 이제 생명의 길이다.

검은 먼지 풀풀 날리던 운탄길은 보물길이 됐다. 검은 흙길은 비와 바람에 씻기고, 풀들이 돋아 ‘하늘길’이 됐다. 봄 여름 가을 온갖 야생화가 피고 진다. 요즘엔 노란 감국, 연보라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검은 땅에서 어떻게 그런 눈부신 꽃을 피울까? 검은 즙을 마시며 어떻게 살아났을까? 나무들은 진폐증에 걸리지 않을까? 풀들은 허파꽈리가 무한대일까?

폐광에선 침출수가 진물처럼 흘러나온다. 그 진물은 일단 자연정화시설에 모여 걸러진다. 부들 같은 풀들이 독성을 중화시킨다. 직사각형의 시멘트정화시설은 거무튀튀한 쇳물자국으로 얼룩졌다. 중금속 진액이 시멘트 바닥에 누런 가래처럼 가라앉아 있다.

화절령(花折嶺)은 ‘꽃을 꺾는 고개’이다. 꽃나무 가지가 꺾일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름이 예쁘다. 옛날 봄이 되면, 지천으로 핀 진달래 철쭉꽃을 꺾으러 너도나도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달래 철쭉꽃이 그리 많지 않다. 그 대신 철따라 온갖 들꽃들이 피고 진다.

차로 가는 가장 높은 고개, 만항재

화절령 삼거리 부근엔 도롱이와 아롱이 연못이 있다. 산 밑 석탄갱이 무너져 생긴 습지이다. 지름이 얼추 80∼100m쯤 될까. 산 아래 땅이 꺼지자 위쪽 땅도 움푹 들어가 연못이 된 것이다. 당시 거기에 살던 키 큰 나무들도 뿌리가 들떠서 죽었다. 죽은 나무들은 병풍처럼 서 있거나, 늪 속에 그대로 누워 있다. 오래된 흑백사진이다.

도롱이 아롱이 연못엔 도롱뇽이 산다. 새벽이나 늦은 밤엔 노루 멧돼지 사슴이 목을 축이고 간다. 옛날엔 광원 부인들이 이곳에 와서 남편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도롱뇽이 많이 보이면 길조로 여겼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날엔 애간장을 태웠다.

만항재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이다. 지리산 정령치(1172m)나 강원 평창∼홍천 사이의 운두령(1089m)보다 높다. 태백시-정선고한-영월상동이 만나는 삼거리 고개이다. 한밤 만항재에 오르면 하늘의 별들이 우박처럼 이마에 박혀 온몸이 시리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영감은 할멈치고 할멈은 아 치고/아는 개치고 개는 꼬리치고/꼬리는 마당치고/마당가역에 수양버들은 바람을 휘몰아치는데/우리 집의 저 멍텅구리는 낮잠만 자네’

―‘정선아라리’에서

▼기기묘묘 석회암 세상 환선굴은 ‘꿈의 지하정원’▼

5억4000만년 전 석회암층이 빚은 환선굴의 기묘한 생성물들.

정선 태백 삼척 일대에는 석회암 동굴이 많다. 정선 화암동굴, 태백 용연동굴, 삼척 환선동굴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중에서도 환선굴이 있는 삼척 대이리 동굴지대는 동굴전시관이라 할 만하다. 환선굴뿐만 아니라 관음굴, 대금굴, 사다리바위바람굴, 양터목세굴, 덕밭세굴, 큰재세굴 등이 몰려 있다. 5억4000만 년 전 퇴적된 석회암층이 빚은 ‘꿈의 지하정원’이라 할 수 있다.

환선굴(幻仙屈)은 해발 500m의 반공중에 자리 잡고 있다. 굴 입구까지는 모노레일을 타고 간다. 옛날 어느 스님이 도를 닦기 위해 이 동굴에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스님이 신선이 됐다’고 믿었다. 동굴 이름이 환선굴이라고 붙은 이유다. 실제 굴 안에는 온돌 터, 아궁이 흔적과 약초 빻던 돌절구 등이 남아 있다.

굴 길이는 총 8km가 넘는다. 이 중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거리는 1.6km. 관람하는 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동굴은 지금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천장의 돌이 떨어지거나 지하수에 암반이 녹고 있다. 종유관, 종유석, 석순, 유석, 동굴산호 등은 지금도 자란다.

동굴은 어두컴컴한 고래 배 속 같다. 축축하다. 쫄∼! 쫄∼! 사방에서 끊임없이 물이 흐른다. 또옥∼! 똑∼! 첨벙! 물 떨어지는 소리가 밖에서보다 몇 배는 크게 들린다. 가슴이 철렁하다. 온갖 기기묘묘한 백색, 갈색, 흑색 돌들이 환상적이다. 마치 거대한 고래 창자 속을 어슬렁거리는 느낌이다. 아기석순, 엄마석순, 미녀상, 꿈의 궁전, 만물상, 삼겹살 모양의 베이컨시트, 백거북, 동굴팝콘, 악마의 발톱, 도깨비방망이, 오백나한, 지옥소, 옥좌대, 버섯방석, 하얀 마리아상, 사자상, 용머리, 만리장성….

사람들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름 붙이는 순간 본질은 갇힌다. 동굴은 어린 아이 눈으로 봐야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보인다. 먼저 바위 자체만 응시하는 게 좋다. 이름표지판은 맨 나중에 봐도 늦지 않다. 이름부터 보면 풍경이 굳어진다. 온갖 상상력이 피어오를 수 없다. 표지판에는 ‘악어비늘’이라고 돼 있지만 내 눈에는 얼마든지 ‘갑옷’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