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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박영순]문화공간으로 거듭난 옛 서울역

입력 | 2011-11-04 03:00:00


박영순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 교수

우리는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앞서가는 디지털 기술에도 불구하고 문화 수준이 뒤떨어진 나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최근 음악 미술 스포츠와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서의 두드러진 활약은 움츠렸던 우리 어깨를 조금은 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특히 드라마로 시작돼 최근 K팝(한국대중가요)으로 재확인된 한류의 거센 바람은 급성장 과정으로 인해 가려져 있던 한국인의 문화 저력을 유감없이 증명해 보여준다. 창의성에서 독보적인 한글이나 일찍이 발명된 인쇄술 등을 꼽지 않더라도 한국인의 뛰어난 두뇌와 창의적 DNA가 여러 사례를 통해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은 이러한 몇몇 천재적인 예술가나 개별적인 작품만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문화 수준을 말하는 데는 시민들의 질서의식부터 국가가 문화정책에 얼마나 많은 예산을 배정하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민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일상에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돕는 공연장과 미술관, 박물관의 양과 질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 하겠다. 우리가 문화 수준을 논할 때 늘 주눅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아직도 누구나 즐기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일상화돼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 부분 문화 공간의 부족에 기인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문화 교육과 예술적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할 문화 공간의 다양성은 차치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더구나 이러한 예술문화의 소통 공간은 한적한 교외가 아니라 접근성이 높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야 하는데도 많은 문화 공간이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 또한 문제로 지적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8월 복원된 옛 서울역사(驛舍)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운영 관리를 받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소식은 온 국민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옛 서울역은 1925년 건설된 이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수난을 거치면서 민족의 고난과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억의 창고이자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증거물이다. 1970, 80년대에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고도성장의 상징이자 이촌향도의 중심지였지만 2004년 고속철 개통과 함께 새 역사가 들어서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고 철도 역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방치돼 왔다. 하지만 이제 문화부로 소관이 이전돼 건설 당시의 모습을 되찾은 후 시민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한 것이다.

옛 서울역사는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4호로 지정됐는데 이번 복원 후 볼거리는 건축물 자체에 그치지 않고 내부 공간을 활용해 전시된 젊은 작가들의 창의적이고 신선한 설치작품들과 다양한 퍼포먼스로 확장되고 있다. 또한 8월 시작된 이 전시와 퍼포먼스는 6개월간 카운트다운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내년 3월 새로운 프로그램이 정식 출범해 공연 전시 강연 이벤트 등 다양한 문화행사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한다.

교통의 중심지인 옛 서울역이 ‘문화역서울 284’라는 명칭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시민에게 다가선 것은 세계 속에 문화한국을 인식시킬 수 있는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인 동시에 문화와 예술의 출발지로 거듭난 것은 서울이 세계를 향한 문화 발신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여겨져 의미가 더욱 깊다.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은 오래된 철도 역사를 개조해 1986년 개관한 이래 세계적인 현대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문화역서울 284’도 앞으로 많은 실험적 작품이 발현되는 공간으로 발전하여 대중이 문화예술을 즐기고 향유하는 세계 속의 공간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해 본다.

박영순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