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산의 판타지-최예태. 그림 제공 포털아트
정상으로 오르는 여러 갈래의 등산로 중 가장 경사가 심한 곳을 ‘번뇌의 코스’라 부릅니다.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는 첫 지점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나니 마음이 요동치고 무수한 생각이 파동을 일으킵니다. 그럴 때 떠오르는 모든 생각은 잡념이고 유혹이고 망상입니다. 적당히 편한 코스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 정상에 오르지 않고 둘레길만 걷고 싶은 마음, 이쯤에서 머물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며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다. 그래서 정상을 잊고, 절경도 잊고 오직 한 걸음 한 걸음 산행에만 집중하며 마음을 비워갑니다.
모든 등산은 한 걸음의 성취이고 결실입니다. 높지 않은 동산에서부터 히말라야 산맥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정의 결실은 한 걸음의 지속으로 완성되고 또 성취되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완전성 중에 가장 구체적이고 명쾌한 것이 한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걸음은 영원한 현재형이며 무한한 진행형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조상의 지혜가 새삼 감탄스러워지는 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이 평생 추구하는 업(業)이 자신의 관(棺)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1977년 9월 15일 대한민국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던 고상돈 대원이 산에서 잠든 이후 숱하게 많은 산사나이가 산을 무덤으로 삼았습니다. 7대륙 3극점을 밟는 위업을 달성하고도 자신의 한계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은 사람, 박영석 대장도 이제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산에 잠들었습니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던 한 걸음은 이제 불멸이 되어 그는 영원히 한 걸음을 옮기는 현재진행형의 산악인이 되었습니다.
박 대장의 영원한 한 걸음을 되새기며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의 한 걸음을 돌아봅니다. 이룰 만큼 이루고도 끝없이 부족하다고 느낀 박 대장의 무한한 도전정신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한 일상인의 제자리 맴돌이를 자각합니다. 도전정신은 매번 자신을 깨고 부수는 일이니 그것이 없는 삶은 속물성과 직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사를 귀찮아하고 짜증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나약함, 하찮은 일도 대단한 일인 양 과장하고 포장하며 끝없이 남과 쟁투하려는 심사는 모두 도전정신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진정한 도전정신,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진정한 한 걸음을 내디디는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영원한 대장 박영석이 그랬던 것처럼.
박상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