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은 행사, 책임은 회피”… 공정위, 43개 기업 조사

국내 대기업집단의 총수와 일가 중 8.5%만 법적 책임을 진 등기이사로 등재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총수 일가의 ‘황제 경영’을 감시해야 할 사외이사들의 경영 견제 활동이 여전히 저조한 것으로 분석됐다.
○ 대기업 총수 일가 등기이사 회피
6일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지배구조현황’에 따르면 올 4월 현재 43개 대기업집단의 전체 등기이사 4913명 가운데 총수 일가는 418명(8.5%)에 그쳤다. 지난해 첫 조사에서 45개사, 4736명의 등기이사 중 425명(9%)이 총수 일가였던 것에 비해 소폭 감소했다.
등기이사로 등재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장단기 사업계획과 주요 투자, 임원 인사 등 회사의 중요 사안을 결정하는 이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 총수 일가는 순환출자 고리를 통해 소수의 지분으로 그룹을 장악하고 이사회 밖에서 경영을 지휘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98년 기업이 부실화됐을 때 소액주주나 채권단이 대기업 총수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사실상 이사제도’가 도입됐지만 소액주주나 채권단이 총수의 업무 지시 사실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이 제도가 활용된 사례는 아직까지 한 차례도 없다.
총수 일가의 등기이사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은 철강회사가 주축인 세아그룹으로 등기이사 80명 중 23명(28.75%)이 총수 일가였다. 10대 그룹에서는 한진(20%)이 가장 높았고, 이어 GS(15%), 롯데(13.58%) 순이었다.
○ 사외이사 반대로 부결 안건 0.05%뿐
총수 일가의 독단적인 경영을 감시하기 위한 사외이사들의 활동도 사실상 유명무실한 수준이었다. 지난해 43개 대기업 상장 계열사의 사외이사 수는 631명으로 전체 이사의 47.5%를 차지했다. 지난해 시가총액 상위 100위 안에 든 79개 대기업 계열사의 이사회 운영 현황을 보면 이사회 상정 안건 2020건 가운데 사외이사의 반대로 부결된 안건은 1건(0.05%)에 불과했다. 1건의 부결도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되기 전 외환은행과 정책금융공사가 소유했던 현대건설에서 이뤄졌을 뿐 총수가 있는 대기업에서는 상정된 안건이 모두 가결됐다.
총수 일가의 경영을 견제할 수 있는 이사회 내 각종 위원회 설치도 저조했다. 특히 일감 몰아주기 등 내부거래를 심사하고 승인하는 역할을 맞는 내부거래위원회를 설치한 기업은 10.6%에 불과했다. 이 밖에 소액주주 권한을 보호하기 위한 집중투표제와 서민투표제를 도입한 대기업은 각각 3.7%, 11.5%에 그쳤다.